
Cry for the moon 上
42
나란히 걷지 않을 것.
둘 사이의 암묵적인 룰이었다. 아무리 가까워도 한 발자국 정도의 거리를 남겨두었다. 대부분 철범이 뒤에서 걸었다. 처음엔 함께 걷고 싶어 부지런히 쫓아갔으나 가까이 다가갈수록 발이 걸려 결국 멀찍이 떨어져 걸었다. 그런 관계였다. 가까워질수록 걸림돌이 되고, 방해가 되는.
어느 날, 평소와 다름없이 그렇게 걷다가 문득 철범은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던가말던가 관심도 없는지 그대로 걸어가는 해일의 뒷모습을 가만히 서서 쳐다봤다. 검은 코트 자락을 흩날리며 걷는 인파 속의 김해일. 잘 찍은 사진 같았다. 보기 좋다는 의미도 물론 있지만, 자연스럽고 신경에 거슬리는 부분이 없다는 의미로. 초점은 오로지 김해일에게 맞춰져 있었다. 다른 사람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크니 맞추기도 쉬웠다. 사진을 배워볼까, 저 모습을 담을 수 있게. 사소한 감상이 쓸데없는 생각으로까지 이어지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동안에도 해일은 열심히 발을 놀려 저 멀리 사라지고 있었다. 이대로 보내줄까. 혼자 걸어가는 해일은 철범도 잘 알고 있듯이 당당하고, 세상 무서울 것 없는, 성령을 깡으로 받은 신부였다. 깡패와 신부. 진부한 삼류 소설이면 모를까 해피엔딩을 기대하기 불가능한 조합이었다.
2년하고도 9개월이었다. 철범이 죗값을 모두 치르고 출소한 날, 그 날은 눈이 왔다. 그것도 5년 만의 폭설이었다. 온 세상이 새하얬다. 눈 때문에 차가 움직이질 못해서 훈석도 오지 못했다. 졸업하면 두부를 먹어야 되는데, 나는 두부 대신 눈인가- 철범은 감옥에 있는 동안 철학은 물론 각종 문학 서적을 완독했더니 꽤나 감성적인 사람이 되었다. 그렇게 새하얀 세상을 죽 둘러보다가 아주 익숙한, 검은 인영을 발견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 목덜미만 빼면 아주 새까만.
“신부님?”
대답 대신 주먹이 날아왔다. 제대로 방어도 못 하고 (구)고도로 훈련된 살인병기의 라이트훅을 맞은 철범은 크게 비틀댔다. 그런 철범이 웃겼는지 킥킥대던 시커먼 사람은 두부를 내밀었다.
“눈 와서 안 사려고 했는데”
“아니 다짜고짜 주먹을 날리는 게 어디 있데요?”
“한 대 맞기로 했잖아.”
“그걸 여즉 기억하고 계셨답니까, 기억력도 좋으셔라.”
“됐고, 너 새사람 되라고 주님이 눈까지 내려주셨으니까 착하게 살아. 내가 지켜볼 거야.”
그 말을 하고 그 새까만 신부는 새까만 코트를 흩날리며 휙 돌아서 걸어갔다. 철범은 허둥지둥 쫓아갔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훨씬 여유롭고 평온해 보이는 모습에, 이유는 모르겠으나 안심이 되었다. 눈과 얼음으로 얼어붙은 도로는 하느님도 어쩔 수 없는 지 둘은 구담구까지 걸어갔다. 눈이 오면 덜 춥다더니 순 엉터리였다. 12월인데도 코트를 입고 다니는 해일이나 들어갈 때의 옷차림이라 수트를 입은 철범은 결국 귀와 코가 벌게진 채 구담구에 입성했다. 외곽에 위치한 성당과 달리 철범이 들어가 있는 동안 훈석과 장룡이 세운 회사는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금방 보였다.
“어떻게, 올라가서 커피라도 한 잔 허고 가실랍니까?”
“그래”
사실 기대도 안 했는데, 긍정의 뜻을 비친 해일에 당황한 것은 철범이었다. 얼빠진 철범을 두고 해일은 건물 안으로 쏙 들어갔다.
“아이고, 고생하셨슈”
“고생하셨습니다, 사장님”
몇몇은 잡혀 들어가고 몇몇은 멀리로 보내서 걱정이 많았는데 다시 잘 모인 모양인지 익숙한 얼굴들이 철범을 반겼다. 커다란 덩치들이 얼싸안고 눈물의 상봉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해일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지랄하네. 이거 보여주려고 나 데려왔냐?!”
그제야 철범은 눈물을 닦고 사장실로 해일을 안내했다. 주인 없던 방이라 그런지 그 흔한 믹스커피도 없는 것에 철범은 또 당황했다. 새사람 된 첫날부터 어째 영 불안한데, 뭐가 이렇게 아다리가 안 맞지?
“그, 신부님”
“왜”
“커피가 없는디요?”
“뭐? 아니, 너네 커피도 안 마시고 살아?”
“아니, 지가 오늘 나왔는디.... 나갑시다. 카페에서 사줄텐게.”
“됐어. 시간도 애매한데 밥이나 사.”
저가 모르는 새에 돈이라도 맡겨놨는지 커피도 모자라 뻔뻔하게 저녁까지 요구하는 해일에 철범은 어이가 없었으나 거절한다고 한들 저 신부가 물러설 것 같지도 않고, 누구 말마따나 자신은 이제 새사람이기에 또 순순히 해일을 근처 식당으로 안내했다. 식탁 위엔 수저가 달그락거리는 소리밖에 나지 않았다. 철범은 이런 분위기가 어색하면서도, 대화를 하는 것이 더 어색할 것 같아 잠자코 밥을 먹었다. 그나저나 저 신부랑 마주 앉아 밥을 먹는 날이 올 줄이야. 감옥에서 몇 번 상상해보긴 했으나 막상 현실이 되자 생각보다 더 숨이 막혔다.
“야, 깡- 아니, 황철범”
먼저 입을 연 것은 해일이었다. 고 작은 입으로 어찌나 잘 먹는지 꼭 다람쥐를 보는 것 같아서 몰래 힐끔힐끔 훔쳐보던 철범은 뜨끔했지만 티는 내지 않았다.
“왜요”
“소주 마실래?”
결국 철범은 소리 내어 와하하 웃고 말았다. 성령을 깡으로 받은 게 아니라 성령으로 낯짝에 철판을 깔았구먼. 너무 웃어서 이젠 눈물까지 찔끔 흘리는 철범을 쏘아보던 해일은 그 웃음을 허락의 뜻이라 생각하고 소주 두 병과 어묵탕을 시켰다. 식탁 위에 잔이 맞부딪히는 소리까지 추가되었다. 오랜만에 느끼는 목구멍이 홧홧해지는 느낌에 철범이 얼굴을 찌푸렸다. 그렇게 얼마나 마셨을까, 두 병이었던 소주병이 새끼라도 쳤는지 어느새 8병이었다.
"신부니임..."
"뭐야아... 너 버얼써 치했냐?"
"그라는 신부님도 혀가 반토막이 났는디요."
"이씨, 너 사제한테 불경스럽게 혀는 무슨..."
"아니 신부님 혀는 뭐 볼드모트여요? 말도 못하게 하고..."
둘 다 잔뜩 취해서 이상한 포인트에서 불이 붙어 말싸움이 시작됐고, 사제의 혀를 언급해도 되는가에 대해 진지하게 토론을 하다가 2차를 가자며 철범의 집으로 향했고, 또 술을 마시다가 이번엔 사제, 정확히는 해일의 몸에 대해 토론을 했는데, 이게 영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너 지금 뭐라고 했냐아?"
"맞잖아요. 겁나게 야햐게 생겨가지고..."
"니가 봤어? 이씨, 보지도 못했으면서..."
"아 그럼 보여주던가!"
평소의 해일이라면 그게 사제한테 할 소리냐며 역정을 냈겠지만 잔뜩 술에 취한 해일은 사리 분별이 안됐고, 여기서 물러나면 자존심이 상할 것 같아서 그렇게 한 겹 한 겹 옷을 벗었더랬다. 그 뒤로 어쨌더라- 철범은 쪼개질 것 같은 머리통을 붙들고 생각했다. 눈을 뜨자 침대였고, 옆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해일이 누워있었다. 새사람 돼서 감옥에서 나온 지 12시간도 안 된 것 같은데 철범은 당장 다시 돌아가야 될 것 같았다. 그 와중에 조금씩 짜맞춰지는 기억의 조각들이 죄다 살색이라 더욱 그랬다.
"안에...니다..."
자괴감에 빠져 허우적대던 철범을 건져 올린 건 해일의 잠꼬대였다.
"뭐라고요 신부님?"
"애들이...확인을..."
악몽인지 인상을 쓰고 작게 웅얼거리던 해일은 어느 순간 울기 시작했다. 철범은 그대로 굳어 아무것도 못했다. 그 땐가, 뉴스에도 나왔던 사건. 아직도 거기서 벗어나지 못한 해일이 안쓰러워 볼에 흘러내린 눈물을 닦아주려고 손을 뻗었다가 멈췄다. 어느새 눈물을 그친 해일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앓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고문이라도 당하는지 점점 커지는 몸부림과 신음에 이러다 뭔 일이라도 나겠다싶었던 철범은 해일을 흔들어 깨웠다. 아니 깨우려고 했다.
"커헉,"
"...뭐야, 황철범?"
해일의 몸에 손이 닿자마자 제 위에 올라타 목덜미를 움켜쥐는 해일만 아니었다면. 철범은 그 찰나에 마주친 해일의 눈을 보고 이렇게 죽는 건가 싶었다. 한 번도 보지 못한, 텅 빈 눈동자. 봉고차 앞에서 주먹다짐을 했을 때도 그런 눈빛이 아니었다. 그때의 해일의 눈엔 분노, 슬픔, 연민 같은 감정이 들어있었다. 콜록거리며 급하게 숨을 고르면서도 그 살벌한 눈빛을 지워낼 수 없었다.
"야, 미안. 괜찮아?"
"우리 신부님은, 큼, 잠꼬대도 파이팅있게 허시네"
"그게- 아니, 근데 여기 어디야?"
“제 집인디요.”
꿈뻑- 꿈뻑- 해일은 부어서 잘 떠지지도 않은 눈을 두 번 깜빡였다. 전날 알코올에 절여진 뇌가 아직 활성화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황철범이랑 저녁을 먹었고, 술도 마셨고, 술도 마셨고, 술도 마셨고.... 젠장, 그 뒤로 어떻게 됐더라? 불행인지 다행인지 해일의 기억은 식당을 나서는 순간부터 끊겨있었다. 기억의 미로에서 길을 잃은 해일이 머리를 쥐어뜯는 동안 철범은 교도소에서 친해진 주님께 SOS를 쳤다.
‘제가 기도하면서 신부님 생각을 많이 한 것도 맞고, 나가면 좀 가까워지게 해달라고 한 것도 사실인디, 이렇게 갑자기 훅 들어오면 워떠캅니까?'
교도소에 있는 동안 철범은 정말 한 주도 안 빠지고 미사에 참석했다. 처음엔 죄책감 때문이었다. 아버지같이 모시던 이 신부님을 그렇게 떠나보내고 그 죽음을 유린한 죄. 그 죄를 용서해줄 사람은 이제 없지만 십자가에 대고 고하면 이 신부님이 듣지 않으실까, 그런 마음이었다. 그러나 미사를 집전하는 신부를 보는 순간, 녹색 제의를 입고 있던 해일이 떠올랐다. 주일 바로 다음 날 그렇게 되는 바람에 신부 노릇을 하는 해일을 한 번 밖에 보지 못했다는 게 영 아쉬웠다. 그래서였을까, 매주 미사를 나가며 해일을 생각했다. 김 신부님 키가 훨씬 더 크네. 김 신부님보다 목소리가 좀 높네. 강론은 좀 더 차분하게 잘하네.
“황철범 형제님”
두 달이 조금 넘게 개근한 덕분인지 어느 날 교정사목신부가 철범을 불렀다.
“시간 되시면 잠깐 얘기 좀 할까요?”
자신을 정수혁 요셉이라 소개한 신부는 회색 사제복을 입고 다녔다. 요샌 트렌드에 맞게 베이지색도 나온다고 했다. 철범은 고집스럽게 검은 사제복만 입고 다니던 어떤 신부가 생각나서 피식 웃었다.
"혹시 세례 받을 생각 있으신가요?"
"예전에 받았는디요."
"원래 성당 다니셨어요?"
"예, 가끔... 들어오기 몇 달 전부터는 안 갔습니다."
"왜 그랬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큰 죄를 지어가꼬, 도저히 엄두가 나질 않더라고요."
"전 그 말이 더 반가운데요? 죄책감이 있으신 거잖아요. 사실 매주 오시는 분들이라도 이렇게 대화해보면 떡신자가 대부분이거든요."
"아...."
"혹시 돌아온 탕자의 비유, 아세요?"
성실한 신자가 아니었음에도 아는 이야기였다. 자신 몫의 재산을 챙겨 떠난 아들이 그것을 탕진하고 돌아오자 아버지가 기뻐하며 잔치까지 열었다는,
"형제님이 돌아오시면 주님께서도 기뻐하실 거예요."
주말미사에 상담이 추가되었다. 정 신부는 살얼음판 같은 교도소에서 마음을 놓고 만날 수 있는 괜찮은 사람이었다. 일주일에 한번 보던 것이 얼마 지나지 않아 두 번, 세 번이 됐다. 자연스레 친해졌고, 사소한 얘기도 나누었다.
"제가 사실 신부님 때문에 여기 들어온 겁니다."
"저요?"
"아니, 전에 다니던 성당 신부가 심판과 단죄를 우선시하는 사람이라."
"혹시... 김해일 신부님?"
"아는 사이십니까?"
"저희 수도회 출신은 김해일 모르면 간첩이에요. 얼마나 유명했는데, 걔 아직도 그러고 다니는구나."
"그 때도 여기저기 쑤시고 다니고?"
"당연하죠. 동기라서 같은 방 썼는데 처음엔 말을 거의 안 했어요. 저도 다른 일 하다 온 거라 동갑이여서 친해지려고 했는데. 키 크고 잘생겨서 무명 배우였단 소문도 있었는데 너무 예민하게 굴고 잘 어울리지도 못해서 어른들한테 많이 불려갔어요."
"하여간 어디를 가도 조용히는 못 지내시네."
"근데 워낙 잘나서 따르는 동생들도 많고, 어느 정도 지나니까 편하게 대하더라고요."
전혀 몰랐던 해일의 과거. 정 신부의 말에 따르면 해일은 겉으론 엄청 틱틱대지만 뒤로 많이 챙겨주고, 꼰대 같은 윗사람들한텐 잘 으르렁댔지만 동생들한텐 한없이 다정한 사람이었다. 철범이 알던 그대로.
"근데 걔 잠버릇 고쳤나? 새벽마다 끙끙거렸는데."
당시엔 그냥 넘겼던 말이 퍼뜩 생각이 났다. 이 신부는 도대체 언제 자신을 용서할 수 있을까.
"야, 나 배고파."
"씻고 오셔요. 라면 끓여드릴텐게."
"나 계란 두 개 넣어, 헉!"
순식간에 곤두박질친 시야에 해일은 당황했다. 분명 바닥에 발을 딛었는데 난 왜 바닥에 주저앉았는가. 그와 동시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하체와 익숙하지만 기분 나쁜 근육통이 느껴졌다.
"야 이 개새끼야!!"
해일의 욕설에 후다닥 달려온 철범은 이제 저 신부가 저를 죽이겠구나 생각했다. 아까처럼 목 졸라 죽일까? 저 신부라면 패죽일 수도 있을 것인디...
"허리 아파 뒤지겠잖아!! 나 못 움직이겠으니까 라면 다 됐으면 여기로 가져와"
어라? 이건 정말 예상 밖이었다. 신부라는 작자가 남자랑 같이 자놓고 허리가 아프다고 짜증내는 게 정상인가? 애초에 저 신부가 정상이란 생각은 없었지만 정말 또라이였다. 그렇게 침대 앞에 탁자를 놓고 라면을 먹고 나니 해일은 배부르니까 졸리다며 꼼질꼼질 이불 속으로 들어간다.
"아니, 성당 안 가십니까?"
"응. 나 오늘 미사 없어"
"그 뜻이 아니잖어요."
"왜, 나 있는 거 불편해?"
편할 리가 있나, 내가 신부님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데. 그 말은 차마 뱉지 못하고 한숨만 쉬었다.
"걔 술버릇 진짜 대박이에요. 혹시 나중에 같이 술 먹을 일 있으면 어디 못 나게 하세요."
"나가서 깽판이라도 친답니까?"
"차라리 깽판이 낫지, 만두 먹으라고 뜨겁게 데워가지고 하나씩 입에 넣어준다니까요? 그 때 입천장 다 까여서 밥도 제대로 못 먹었는데..."
"오렌지 엄청 좋아해요. 아, 오렌지 때문에 애교도 부렸는데. 걔가 은근 애교가 많아요. 까칠하긴 한데 귀여운, 고양이 같달까?"
이런 얘기를 들으며 나가면 같이 술이나 마셔야지, 나중에 오렌지 잔뜩 사줘야지, 애교 부리는 거 보고 싶네- 그런 생각을 했다. 그리고,
"피의사실 다 인정했다며"
해일이 다녀간 날 온종일 머릿속을 떠다니는 해일의 마지막 얼굴에 확신했다. 내가, 저 신부를, 좋아한다고.
1시까지 푹 자고 일어난 해일은 찌뿌둥한 허리를 통통 두드리며 욕실로 향했다. 철범은 출근했는지 보이지 않았다. 거울에 비친 꼴이 가관이었다. 목덜미는 죄 씹어놔서 얼룩덜룩했고, 볼에는 눈물자국이, 손목은 벌겋게 부어올라 있었다.
"고문이라도 당한 것 같네."
그래도 좋았으니까. 드문드문 떠오르는 기억 속에서도 저를 내려다보던 눈빛은 선명했다. 열기로 가득 차 이글거리는 검은 눈동자. 해일은 헛숨을 삼켰다. 그러나 이내 수도꼭지를 최대한 오른쪽으로 돌렸다. 이상한 생각 하지마라, 김해일.
그 뒤로 바뀐 것은 없었다. 철범은 회사일로 바빴고, 해일은 성당일로 바빴다. 12월의 성당은 판공성사를 보러 오는 신자들이 끊이질 않았다. 한 시간도 넘게 앉아있었네. 시계를 본 해일은 주먹으로 뻐근한 허리를 두드리며 성호경을 그었다. 그러자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아멘. 고해한 지 한 달 됐습니다."
"네, 고해하세요."
"제가 큰 죄를 지어서 죗값을 치르고 나오자마자 또 큰 죄를 지었습니다. 이 밖에 알아내지 못한 죄도 모두 사하여 주십시오."
해일의 주먹이 멈추었다. 지금 나를 놀리는 건가? 나랑 잤다고 꼽주는 건가? 단전에서부터 분노가 끓어올랐다.
"무슨 죄를 지으셨는데요?"
"건들이면 안 될 사람을 건드렸습니다."
"아니, 쌍방합의 아니었어? 그리고 뭐? 건들이면 안 될 사람? 내가 뭐 불가족천민이야?!"
"신부님 고것이 아니고, 일단 진정하셔요."
"그럼 뭔데"
"흐미, 환장하겄네..."
"됐어, 죄 없으니까 빨리 나가. 아님 성당 마당 좀 쓸던지"
"...예"
빗자루를 들고 잔뜩 쌓인 눈을 치우던 철범은 방금 일을 회상하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눈치가 없어도 너무 없네. 귀엽기는 하다만.
"어이, 황사장!"
뒤를 돌자 살짝 피곤해 보이는 해일이 있었다.
"왜요"
"술 마시러 갈래?"
"신부님 저한테 무슨 불만 있으십니까?"
"뭔 소리야"
"아니, 그, 그 사단이 났는데 또 술을 먹자고요?"
"야, 그건 사고였잖아. 근데 너 은근 수줍음 많이 타는구나?"
"허참...됐습니다, 혼자 드세요"
"혼자 마시면 심심한데.... 그럼 그냥 앞에 앉아만 있어."
"구형은 죽었답니까? 이제 나를 끼고 다닐라하시네?"
"구대영 바빠. 그니까 시간 많은 네가 따라와."
결국 또 마주 앉았다. 앉아만 있으란 말이 진심이었는지 한 잔도 안 권하고 자작 퍼레이드를 펼치는 해일에 철범은 또 웃었다.
"신부님"
"우응.."
소주를 소주잔 대신 물컵으로 물마시듯 달리더니 벌써 취한 모양이다.
"내가 어떤 놈인지 알고 이렇게 무방비하십니까."
"너느은, 나쁜 놈이지"
"잘 아시네요"
"근데 원래 나쁜 놈은 아니잖아. 나쁜 척 하는 거지."
"그건 또 처음 듣는 소린디"
"살고 싶었다며"
그렇게 말하는 해일의 눈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이 벌게서, 철범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쁜 짓 한 거슨 난디 왜 신부님이 울라 그려요
"나도 살고 싶었어. 근데 내가 살려면 남을 죽여야 했어. 그래서 다, 다 죽였어. 진짜 백 명은 넘게 죽였을 걸?"
"그라도 이렇게 회개하고 잘 살고 있잖아요."
"...잘 사는 것 같아? 난 아직도 내가 죽인 아이들 꿈을 꿔. 하루도 안 빠지고 용서해달라고 비는데, 너도 봤잖아."
슬픈 눈을 한 해일은 철범이 알던 그 당당하고 깡따구 있는 신부가 아니었다. 금방이라도 바스라질 것 같이 연약한, 인간 김해일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말없이 쳐다보더니 테이블에 머리를 박았다. 다행히 철범이 빠르게 손을 대줘서 큰 소리는 나지 않았다. 몸도 못 가눌 만큼 취한 해일을 업고 성당까지 걸었다. 겉으로 볼 때는 말랐는데 키가 크다보니 꽤 무거워서 땀까지 났다. 성당 입구에 서서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자 커다란 보름달이 떠있었다. 오늘이 보름인가, 달이 음청 크네. 까만 하늘에 떠있는 달은, 특히 보름달은 사람을 감성적으로 만들어서 철범은 괜히 해일을 업고 있는 지금이 꼭 멜로드라마의 한 장면 같다고 생각했다.
"형제님이 이 시간에 여길, 아이고 김 신부님!"
"제가 멕인 게 아니라 혼자 드신 겁니다."
"감사합니다. 날도 추운 데 고생하셨네요."
변함없이 따스한 신부님과 수녀님에 철범은 마음 한 쪽이 욱신거렸다. 그랬다. 해일은 이곳에 있어야 한다. 수녀님의 만류에도 기어코 사제관 안에 위치한 해일의 방까지 그를 업고 들어온 철범은 해일을 침대에 뉘어주고는 생각에 잠겼다. 철범은 깡패였으나 그와 동시에 수완 좋은 사업가였다. 철범은 어떤 것이 자신에게 득이 되고 독이 되는지 잘 알고 있었고, 독이 되는 일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래서 지금 자신의 상태는 매우 심각했다. 온 감각이 외치고 있었다. 이 감정에 휩쓸리면 큰일 날 것이라고. 그러나 세상모르고 잠든 해일은, 이름값을 톡톡히 하는 사람이었다. 자신은 그 거대한 쓰나미에 빠뜨려 놓고 곤히 자는 것이 얄미워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어버렸다. 그 와중에도 오늘은 악몽을 꾸지 않길 바랐다. 회사로 돌아오는 길, 보름달은 여전히 도시의 밤을 비추고 있었다.
철범은 정말이지 지금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신부님은 할 일이 없으십니까?”
“뭐래, 너 내가 얼마나 바쁜지 알아?”
“근데 왜 여기 와서 이러셔요.”
“내가 생각을 해봤는데,”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하루였다. 퇴근 시간을 훌쩍 넘겨서야 겨우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집에 가서 커피나 한 잔 헐까, 뻐근한 눈을 꾹꾹 누르며 집에 갈 준비를 하는데 사무실 문이 열렸다. 어찌나 세게 열었는지 피곤에 찌들어 뻑뻑해진 눈이 토끼마냥 휘둥그레질 정도였다. 그러나 정작 문을 열고 들어온 본인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사무실로 들어와 쇼파에 척 앉았다. 그러고 한다는 말이,
“아뇨, 못 합니다. 아니, 안 합니다.”
“왜- 사람 하나 구해주는 셈치고, 응?”
“진짜 안 된다니께요?”
같이 자자, 는 것이었다. 물론 해일은 정말 순수한 의도-영어로 sleep-로 제안을 했고, 철범은 불순한 의도-영어로 sex-로 받아들였다는 게 문제였지만.
“저번에 네가 나 업고 왔을 때 나 거의 10년 만에 꿀잠 잤단 말이야....”
“자꾸, 잉?"
"아니면 너 고해할 때 말한 거, 그거 보속이라고 생각하던가."
"...잔다는 것이 그 잠자는 거데요? "
"그럼 어떤, 너 무슨 생각하는 거야 불경스럽게!!"
소리를 빽 지르고 새침하게 코트 앞자락을 여메는 해일이 너무 깜찍해서 철범은 또 져주기로 했다. 좋아하는 놈이 호구해야지 어쩌겠는가. 철범이 고개를 끄덕이자 해일은 어디서 났는지 종이와 펜을 꺼내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글씨는 그 사람의 얼굴이라더니, 정갈하고 깔끔한 글씨체였다.
"매일은 힘들 것 같고, 일주일에 두 번?
"왜요, 이왕 이리 된 거 맨날 오시지?"
"내가 가라고? 네가 와야지"
"아니 전에 보니까 침대도 작더만 나는 어디서 자라고요?"
"별로 안 작거든?"
"됐고, 내 별장으로 오쇼. 어딘지는 알 것이고."
"아, 나 외박 안 하는데... 알았어. 시간은 12시부터 5시까지"
"5시간 갖고 되겄어요? 기양 달 떠있는 동안이라 칩시다."
"너 은근 감성적이다? 달 떠있는 동안이라니, 좋아."
그렇게 황철범과 김해일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을 계약서가 완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