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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창

​로드

정지용 

 

유리(琉璃)에 차고 슬픈 것이 어른거린다. 

열없이 붙어서서 입김을 흐리우니 

길들은 양 언 날개를 파다거린다. 

지우고 보고 지우고 보아도 

새까만 밤이 밀려 나가고 밀려와 부딪히고, 

물 먹은 별이, 반짝, 보석(寶石)처럼 백힌다. 

밤에 홀로 유리(琉璃)를 닦는 것은 

외로운 황홀한 심사이어니, 

고운 폐혈관(肺血管)이 찢어진 채로 

아아, 늬는 산(山)ㅅ새처럼 날러갔구나! 

 

 

 

 

 

김해일은 유독 창가에 앉아있는걸 좋아했다. 시도때도 없이 창가에 걸터앉아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황철범은 그런 해일의 모습을 좋아했다.어딘지 모르게 애틋한 그 모습이 보기 좋다나, 뭐라나. 김해일은 창을 통해 바깥의 풍경을 보는걸 좋아했다. 그리고 그 풍경 속에 있는 황철범의 모습을 좋아했다. 가끔씩 미사 시간이 다 되었을때 커튼을 걷으면 슬렁슬렁 훈석과 함께 성당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자원 사업을 위해 해일과 논의를 하겠다며 성당으로 찾아오는 날도 많았다. 무심한듯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걸어오는 황철범의 그 모습이 김해일은 반갑고 또 좋았다. 어쩌다가 자신을 보고 있는 김해일을 발견한 황철범이 살며시 웃어보이며 손을 흔들때는 얼마나 설렜는지 모른다. 김해일은 그런 이유로 창가를 좋아했다. 그러던 어느날, 김해일이 쓰러졌다. 국정원 요원이었을 시절 사이가 좋지 않았던 동료의 광기서린 복수에 의해서였다. 김해일의 자리는 병원에 누워 있을때도 창가였다. 의식이 없을때도 황철범은 창가에 누워있던 해일이 다시 일어나 자신이 가장 좋아하던 그 애틋한 표정으로 창밖을 다시 봐주길 원했다. 창문에 드리워진 얇은 실크 흰 커튼 사이로 살며시 들어온 햇빛이 해일의 얼굴을 따스하게 비추는걸 보며 황철범은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다시 해일이 일어나 자신을 창문을 통해 보고 있게 해달라고. 둘이 같이 서로를 창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다시 마주보게 해달라고. 하늘은 가혹했다. 해일의 눈은 다시 열리지 않은채 해일은 떠났다. 황철범이 해일이 늘 앉아있던 자리를 지키기 시작했다. 해일은 앉아 있을때 볼 상대가 있었겠지만 철범에게는 볼 상대가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해일이 없었다. 황철범은 무기력하게 창가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날이었다. 지독하게도 쓸쓸한 밤이 긴 동짓날이었다. 그날도 철범은 창가에서 잠이 들었다가 한기가 들어 잠에서 깨 옷을 주섬주섬 입다가 저 밖에 누군가 서 있는걸 보았다. 인상을 찌푸리며 한참을 그 형체를 살피던 황철범의 눈이 크게 떠졌다. 김해일이다. 저 검은 코트. 어둠속에서 약하게 빛에 반사되는 하얀 로만칼라. 저 기럭지. 모든게 김해일이었다. 철범은 신발도 신지 않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런데 아무도 없었다. 조금전부터 내리던 눈이 쌓이기 시작했는데, 발자국은 온통 철범의 것 밖에 없었다. 철범은 한동안 헤매다가 결국 다시 안으로 들어왔다. 다시 창가에 걸터앉는데, 다시 김해일이 보였다. 이번엔 창문을 얼어젖혔다. 없어졌다. 창문을 열자 김해일이 사라졌다. 닫자 다시 나타났다. 그제서야 철범은 깨달았다. 해일은 창문을 통해서만 보이는 것을. 창가에 주저앉아 창밖을 멍하니 내다보았다. 해일의 실루엣이 눈발때문에 잘 보이지 않았다. 점점 해일의 실루엣이 다가왔다. 철범이 서리가 낀 창문을 닦으며 밖의 모습에 집중했다. 어렴풋이 해일의 이목구비가 보였다. 울음이 비집고 나왔다. 

 

 

 

"시..신부님," 

 

철범은 울음을 터트렸다. 해일이 창문에 손을 얹었는지 창문에 손자국이 났다. 그리고 서리가 조금씩 지워지더니 마침내 글자가 되었다.  

 

'왜 울어' 

 

"그야, 신부님 직접 못 보니께," 

 

철범의 대답이 끝나자 바람소리 사이로 해일의 음성이 들리는듯 했다. 철범은 창문에 귀를 가져다대고 귀를 기울였다. 

 

"동짓날이잖아, 오늘이." 

 

"..." 

 

"넌 잘 모르겠지만, 동짓날엔 귀신들이 이승에 잠시 내려와. 그날 밤만." 

 

철범이 고개를 끄덕였다.  

 

"근디, 왜 창문 통해서만 볼수 있는거요?" 

 

"신께서 그렇게 정하셨어." 

 

철범은 다시 고개를 주억거렸다. 해일의 목소리는 언제들어도 좋았다. 해일이 다시 창문에 그림을 그렸다. 철범은 말 없이 그걸 지켜봤다. 찌그러진 동그라미.  

 

'♡' 

 

하트였다. 귀여운 모양에 철범이 웃음을 터트렸다. 해일이 창문을 탁 쳤다. 볼맨소리도 따라 들렸다. 이번에는 철범이 손가락으로 글씨를 천천히 반대로 써내려갔다. 반대로 써야해 시간이 점 걸렸지만 크게 상관없었다. 어차피 동짓날이라 밤은 길었으니까. 

 

'보고 싶었다.' 

 

해일이 잠시 멈칫하더니 자신도 창가에 글씨를 썼다. 

 

'나도.' 

 

철범이 피식 웃었다. 저만 그리워하고 있었던게 아니었다. 해일과 철범은 날이 트기 직전까지 계속 말없이 창문을 통해 대화했다. 동이 트기 직전이었다. 해일이 다급한 손길로 무언가를 썼다. 급하게 써 알아보기 힘들었다. 

 

'사랑해.' 

 

철범이 답을 써넣으려는 순간, 저멀리서 밝은 빛이 들어왔다. 날이 밝았다. 해일의 검은 그림자가 사라졌다. 날이 밝자 서리가 조금씩 사라졌다. 해일의 글자도 사라지는걸 철범은 말없이 지켜봤다.  두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신경질적으로 닦은 철범이 다시 창가에 앉았다. 밝은 빛에 인상을 찡그리던 철범은 살며시 웃었다. 동짓날이 언제더라. 12월 22일. 이제 364일 남았다. 철범은 달력에 꼼꼼하게 표시한후 입에서 미소를 지우지 못한채로 밖으로 나갔다. 창문에 남아있는 서리에 조그맣게 하트가 그려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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