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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

​요원

차가운 입김이 서린 겨울이다. 두꺼운 이불을 장만하던 그 날, 우리의 평화는 무너졌다.

 

그날이 있는 후, 3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그동안 우린 차가운 숨을 내뱉었고, 뜨거운 피를 흘렸고, 시퍼런 칼날을 가르며 그렇게 지냈다.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싸우며 연명하고 있었다.

 

/입춘은 오지 않는다/

 

지하 울퉁불퉁한 좁은 길을 지나 평지가 나올 때 즈음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커졌다. 대략 보름간의 안식처가 될 터라 신중히 정해야 했다. 단체의 두목 해일이 주위를 쓱 둘러보고는 쉬라는 명령을 내리고 작은 바위 위에 걸터앉아 왼손에 감았던 붕대를 풀었다. 손등을 가르는 깊은 상처는 아물 생각을 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적군과 싸울 때 칼날에 베였던 상처는 보면 볼수록 욱신거릴 뿐이었다. 해일은 무덤덤하게 허리춤에 차고 있던 물병을 가져와 조심스럽게 물을 붓기 시작했다. 투둑, 툭 돌에 떨어지는 물방울의 소리는 청아했다. 이토록 이질적인 소리는 그날 이후 끊이질 않았다.

 

“난 더 이상 버티기 어렵소.”

 

모두가 쉬고 밥을 먹는데 한 사람이 벌떡 일어나 해일을 찾아갔다. 식량도 부족하고 적군에 대치할 무기조차 부족한 상황이었다. 이를 모를 해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해일은 잠깐 머리를 쓸어넘기고는 손을 만지작거렸다.

 

“그렇지만 함께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들이 살아야 이 나라를 지키던 합니다. 난 더 이상 이렇게 피해다니고 목숨걸어야 하는 것은 못 하겠소.”

 

금방이라도 이 동굴을 뛰쳐나갈 듯한 완강한 태도에 해일은 더 붙잡을 수 없었다. 그들이 여기까지 오는 동안 무엇을 희생했는지, 어떤 일이 일어났었는지 알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자신에게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이 단체를 만들 시절 아내와 함께 서슴없이 참여하겠다고 했던 이 서방이었다. 하긴, 아내마저 총을 맞아 죽은 이후 제대로 된 정신으로 지낼 수 없었을 것이었다.

그렇게 해일의 곁을 또 한 명 지나쳤다.

일제강점기의 한복판을 지나는 시간 속 자신의 목숨조차 지금 당장 어찌 될지 모르던 때, 그 하찮은 목숨이라도 조국에 도움이 될까 봐 힘을 다해 싸우던 그들이 흔들리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인지도 모른다.

 

날이 밝은 대로 해일은 시내에 다녀올 것이라는 쪽지를 남기고 자취를 감추었다. 귀티 나는 양반의 한복을 입고서 서툴게 양반걸음을 흉내내며 오늘은 또 어떤 지명수배가 내려졌는지 확인을 하러 가던 참이었다. 저 멀리서 시선이 느껴진다. 해일은 날카로운 눈으로 주위에 가장 이질적인 것이 무엇이 있을까 찾으려 애썼다. 양복. 저런 옷차림으로 당당히 서 있는 조선인이 있다. 해일은 조바심을 내며 얼굴을 가리고 있던 큰 갓을 올려 쓰고는 빤히 쳐다보았다. 어딘가 익숙한 얼굴이지만 이질적인 모습, 절대 잊을 수 없었던 자신의 오랜 동무 철범이었다.

 

“양놈이 다 되었구나.”

“너는 여전하구나, 해일아.”

 

작은 산길 속 쓰러져 있는 나무에 걸터앉아 한 첫 마디라곤 여전하구나- 였다. 그래, 3년 전과 같았다. 3년 전 적군에 둘러싸여 있던 해일을 구해준 철범이 한 첫 마디였다. 3년 전 일제의 괴롭힘이 극에 달할 때의 그 날을 아직도 잊을 수 없었다. 게다가 철범의 목소리를 들으니 해일은 다시 끔찍한 악몽이 시작될까 두려워 거칠게 눈을 감았다 떴다.

 

3년 전 그날 해일의 가족을 공격한 일제 놈들 사이에서 보였던 익숙한 얼굴, 철범이었다. 꼭꼭 숨어있다고 생각해 보름 정도를 지냈던 은신처를 비집고 들어온 공포에 앞장선 건 철범이었다. 아무런 무기조차 없이 저항도 못 한 채 죽은 부모님을 등지고 어린 동생들의 손을 붙잡고 달렸다. 철범이 그 사이에 있는 이상 조선 땅 안에서 끝까지 살아남을 수 없을 거라는 걸 직감적으로 깨달은 해일은 차라리 저를 희생시키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어쩌면, 자신의 옛 동무를 보고 도망치게 해주지 않을까, 하는 헛된 희망을 품고 있었다.

 

“얘들아, 너넨 꼭 손 붙잡고 뒤도 돌아보지 말고 달려. 이 오라버니랑 술래잡기 하는 거야. 30 세고 찾으러 갈 테니 그 전에 도망쳐, 알겠지?”

 

놀이하는데 왜 울고 있냐며 제 볼에 손을 갖다 대는 동생들의 손을 맞잡아 서로 붙잡게 한 뒤 등을 떠밀고 해일은 급하게 왜놈들을 향해 달려갔다. 동생들마저 잃을 순 없었다.

하지만 그 뒤로 들려오는 조선말은, 일제를 향해 충성을 다하라는 말이었다. 철범의 입 밖으로 나온 말이 같잖았다. 해일은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비틀거렸다. 이미 일제의 총을 맞아 어깨가 욱신거린 지 오래였다. 낙엽을 밟고 가까이 오는 철범의 발소리는 해일에게 지진이라도 일어나듯 큰 진동을 일으켰다. 자신을 향한 시퍼런 칼날이 턱 끝에 닿자 해일은 철범을 향해 고개를 치켜들 수밖에 없었다.

 

“왜놈이 되고 싶다고 정말 되는 줄 아느냐.”

“너는 여전하구나, 해일아.”

“….”

“저놈들은 자신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면 듣지 못하니 안심해, 김해일. 난 널 살려주려 온 것이다. 조금 있으면 이놈들은 다른 곳으로 떠날 거고, 넌 걸어서 도망칠 것이다. 넌 항상 온몸을 다해 조선을 지키지. 난 오래전부터 노비의 자식이었기 때문에 빌붙어서 기회를 노려야 하니, 제 명줄대로 살도록 하자. 이것 하나 명심해다오.”

 

뒤를 돌고 등을 보여라. 난 칼로 널 벨 것이고 넌 죽을 것이다-

 

완벽한 어휘력을 구사하며 일본어로 명령을 내린 철범의 말에 해일은 충격에 휩싸여 있었다. 아, 이게 이리되는구나. 우리의 연은 닿으면 안 되는 것이었구나. 어릴 적 널 보며 좋아했던 내가, 이리 내 숨을 옥죄는구나.

 

철범은 뒤를 돈 해일의 등을 칼집에 칼을 넣은 채 베었고 옷자락만 흩어지며 나부꼈다. 이를 멀리서 본 일제 놈들은 몸을 돌려 다른 곳으로 이동했고 철범은 칼집에서 칼을 빼 해일의 어깨의 살가죽을 살짝 베어 피가 묻어나게 했다.

 

“나 또한 조선이 독립하길 바란다. 이 뿐이다.”

 

그래, 이 모든 게 무엇이 중요하니. 제 목숨을 내뱉어 조선이 독립한다면 당연히 내주어야 하는 것이 인지상정. 해일은 아려오는 어깨를 잡아 짓눌렀다. 흉터는 남아돌아 해일의 마음을 판 지 3년이 지났다.

 

“난 너를 죽일거야, 황철범.”

“…네가 그리 나온다면야,”

“너 때문에 내 아버지, 어머니가 눈앞에서 돌아가셨어. 그 때 놓친 동생들의 손은 잡아본 적이 없어. 난 널 죽이고 그 때 죽을거야.”

“나 아니었어도 왜놈들이 먼저 갔을 거다. 내 덕에 너가 살아남은거고.”

 

철범의 차가운 말투에 해일은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사실, 맞는 말이었고 어쩌면 제 동생들을 놓친 건 제 발이 느려서일지도 몰랐다.

 

“너가 끝까지 살아남아서 조선이 독립한 후에 다시 만나자.”

“….”

“우리가 저번엔 추분에 만났고, 지금은 동지이니. 다음은 입춘이려나.”

 

꽃이 만개하는 그때, 날 죽여다오. 철범이 해일의 손을 쥐었다가 놓고 자리를 떠났다. 철범이 서 있던 자리엔 금방 눈이 차올랐고 해일은 가시지 않은 온기를 느끼며 덜덜 손을 떨었다. 죽인다는 말은 했지만 절대로 죽이지 못할 것을 스스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더 저 자신이 원망스러웠지만, 숨이 막혀 그렇게라도 해야 했다. 철범을 남모르게 좋아한 저 자신을 향한 벌이었다.

 

그날 이후로 해일은 바삐 지냈다. 몸을 숨기느라, 적을 해치우느라, 단체의 사람들을 챙기느라 몸이 남아나질 않았다. 가장 앞장에서 총알을 받아냈던 해일의 단체였기 때문에 더 버틸 수 없어 마지막 대 전투를 마무리하고 해산하기로 했다.

 

성가신 밀정 몇을 죽이고 나서야 작전이 술술 풀리기 시작했다. 이상하리만큼 평화롭게 진전되자 해일은 께름칙함을 숨길 수 없었다. 이즘에 서면 왜놈이던, 양놈이든 들어와야 하는데 수상하게 조용했다. 가끔 들어오는 무리여도 준비조차 덜 되어 있어 습격당해 몰살당하기 일쑤였다. 마지막 골목이었다. 이 전투를 끝으로 해일의 단체는 해산할 것이고 해일은 조만간 독립 열사로 이름이 남을 것이었다. 전투를 이끌고 다음 날을 위해 휴식을 취하던 참이었다. 툭 굴러오는 돌멩이를 주운 해일은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해 제 다리길이 만한 칼을 가지고 은신처를 나왔다. 몇 걸음 가지 않아 멈춘 그 곳엔 철범이 서 있었다.

 

“입춘은 되지 않았고…,”

“….”

“독립은 되려 하는데…. 이 즘 나타나면 기뻐하지 않을까 해서 왔소.”

“황철범 이 개자식, 무슨 수작으로 이렇게 나타났는데? 내가 네 놈 상상대로 기뻐할 줄 알았어? 난 널 죽일거라고. 분명 그 때 언질을 주었던 것 같은데.”

“전투가 되게 수월했지? 하하호호 웃을 때도 다 있고.”

 

철범의 다 아는 듯한 표정을 본 해일은 그제서야 입이 벌어졌다. 전에 분명 철범 또한 독립을 바라고, 제 명이 다할 때까지 제 위치에서 행할 것이라 하였다.

 

“이제 알았구나, 해일아.”

“그래도 네가 내 부모를 죽인 것은 달라지지 않아.”

“그래, 죽여.”

 

철범이 먼저 달려들었다. 악착같이 덤비는 철범의 몸짓엔 빈틈이 많았다. 일부러 해일에게 맞으려는 듯한 행동이었다. 노비로 자란 철범은 분명 양반인 해일보다도 더 맷집이 세고 끈질겼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 당장 보이는 건 철범이 죽으려고 달려드는 것이었다. 해일은 철범을 밀쳐내고 뒤로 물러서 칼을 꺼내 들어 철범을 향해 겨누었다.

 

“편히 사실대로 말하면 될 것을, 오랜 시간 돌아오며 날 어리게 만드는구나.”

“이것이 노비의 처지 아니겠습니까, 도련님.”

 

비꼬고 있었지만 맞는 말이었다. 항상 그랬다. 어렸을 적 말을 섞을 때부터 철범은 해일을 향해 거짓을 논한 적이 없었다.

 

“그래도 시간이 흘러 네 이름을 불러보기도 하고. 몇 번이라도 도련님의 이름을 불러보니 좋긴 좋았습니다.”

“….”

“도련님 말대로 우리의 연은 닿으면 안 되었을지도 모르죠. 그래도 이리 재미있는 상황이 되었으니, 어떠십니까. 그 칼로 절 찌르실 수야 있으실까요.”

 

철범을 향해 겨눈 시퍼런 칼날은 달빛을 받아 반짝거렸지만 그 칼을 잡은 해일의 팔은 부들거렸다. 덜덜 떨리는 팔은 더 이상 어쩔 수 없었다. 스스로도 죽이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직 깊은 구석에 철범을 좋아하는 마음을 가지고 숨겨놨기 때문에.

 

“도망쳐라.”

“….”

“네가 나에게 그랬던 것처럼. 뒤도 돌아보지 말고 도망쳐라. 조선을 지킨다는데, 달리 할 방법이라도 있겠는가. 황철범 네 놈은 계속 왜놈이건, 양놈이건 피를 빨아먹으며 조선을 지켜라. 난 내 피를 내어주며 조선을 지키겠다.”

 

그리고, 나에게 입춘은 오지 않을 것이니 그리 알거라.

 

냉정한 말투였다. 절대 다시는 철범을 제 인생에서 보지 않을 것을 맹세하고 있었다.

유난히 달빛이 반짝거리는 밤, 빨간 실의 연은 해일의 칼날에 의해 끊어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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