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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 (救援)

환상

[5년 전, 러시아 모스크바]

 

 

 

 

“예, 방금 숙소 들어왔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쉬십쇼.”

 

 

 

해일은 그대로 침대에 엎어졌다. 그 채로 대충 타이를 끄르고 눈을 감는다. 참 모순적이게도 피곤함에 찌들어 눈을 감으면 그렇게 정신이 또렷할 수가 없었다. 근래 제대로 잠을 잔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어쩌면 잠이 들 생각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매 작전의 희생양이 된 사람들-그들이 그 사실을 알든 모르든 간에-을 위해 하던 새벽 기도는 스스로에 대한 끝없는 책망으로 이어질 뿐이었다. 숨 쉬는 순간 사이마다 날카롭게 죄책감이 파고들었다. 모든 것을 그만두고 싶다. 이 일뿐만이 아니라, 이 삶조차도. 해일은 매일 밤 자신을 아득한 구렁텅이로 끌어 내렸다.

 

차가웠던 새벽이 무색하게 아침은 밝아 왔다. 다음 주부터 본격적인 임무가 시작이라는 상사의 말이 귓가를 맴돈다. 괜히 머리가 어지러워져 편한 차림으로 갈아입고는 자켓 주머니를 뒤적여 담뱃갑을 찾았다. 속이 비었는지 형편없이 구겨지는 게 꼭 제 처지같다. 짧게 한숨을 내쉬고 대충 겉옷을 챙겨 나왔다. 문이 닫히는 건조한 신호음을 뒤로하고 발을 질질 끌며 걷는다. 그날이었다. 김해일이 존재하는 모든 불행을 직격으로 당면해버린 비운의 주인공처럼, 왜 이 세상에 떨어진 지 모를 하나의 생명체처럼 공허하고도 초점 없이 비어버린 눈을 하고 있던 날. 어쩌면 저를 현실이라는 지옥에 밀어 넣었을지 모르는 신을, 앞으로 더 길고 깊은 파멸의 길로 인도할 황철범을 처음으로 만나게 된 날.

 

그날은 밤이 가장 긴 날이었다.

 

 

 

 

-

 

 

 

 

“구담구요?”

 

“예, 이영준 신부님께 연락드렸습니다.”

 

 

 

아니 왜-. 반문하려던 해일의 말이 날 선 눈빛에 자취를 감췄다. 얼결에 피난처가 되어버린 구담구는 그닥 정의로운 동네는 아니었다. 해일은 이곳이 벼랑 끝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얌전히 지내라는 애원 섞인 부탁도 다음은 기약하지 못할 것이다. 아마 그 끝은 가지런히 접혀진 사제복을 뒤로하고 떠나는 제 뒷모습이겠지. 그날로 조용히 살겠다 다짐한 해일이었지만, 성격상 저의 마지막이 머지않아 도래할 것을 예감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여태껏 무수히 많은 끝을 마주했지만 ‘김해일’ 자신 그 자체로 맞는 건 처음일 터였다. 매일 성당에 들어서며 느껴왔던 감정들을 등질 수 있을까. 해일은 여수를 떠나 도착한 구담구에서의 첫날부터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침 햇살에게 얕게 잠든 사람 하나쯤 깨우는 일은 식은 죽 먹기였다. 부엌에서는 벌써 소리가 들렸다. 영준을 차마 볼 낯이 없어 무어라 말을 고르던 찰나 두어 번 노크 소리와 함께 방문이 열린다. 나와서 밥 먹어라. 그 한마디가 어떤 의미로 다가왔는지 요새 통 나오지 않던 웃음이 긴장한 얼굴을 비집고 새어 나왔다. 구담 성당은 평화로웠지만, 해일을 옥죄는 죄책감은 사그라들기는커녕 더욱 저를 죽이려 들었다. 영준은 그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그래서 인사를 핑계로 그렇게 밖을 내돌게 했던 것이다. 성당과 고아원부터, 구담구 구석구석까지,

 

 

 

“대범 무역? 뭐예요 이건?”

 

“뭐긴 뭐야, 무역 회사지.”

 

“딱 보니까 견적 나오네. 회사일 리가 없죠.”

 

 

 

입구 지키고 서 있는 것들만 해도 벌써 깡패 티가 나는데. 영준은 고개를 내저었다. 해일은 제 이름을 나지막이 부르는 목소리에 이길 생각은 없었다. 대충 건물을 훑어보고는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때마침 철범은 출장에서 돌아온 참이었다. 창문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얼굴이 퍽 익숙하다. 김이한? 무의식중에 뱉은 누군가의 이름은 훈석에게도 다분히 익숙해진 세 글자였다. 여수에 있을 적부터 지독하게 철범이 부탁하던 일이었다. 석아, 사람 하나만 찾아봐라. 한번이 ‘더’가 되고, 그렇게 두 번, 세 번, 나중엔 멋쩍은 웃음으로 대신한 것이 셀 수도 없을 정도였다. 구담구로 올라와 본격적인 사업을 시작하며 바빠지기 전까지는, 매달 꼬박 훈석은 달라지지 않는 결과에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하지만 예상외로 철범은 무던했다. 평소와 다름없이 다음 날 일정을 체크하고, 얼굴에 피곤함이 다 드러나는 데에도 출장 탓에 밀린 서류 작업을 하겠다며 기어코 사무실에 남았다. 적당히 하고 들어가 쉬시라는 말을 끝으로 훈석이 퇴근하자, 철범은 소파에 기절하듯 누워 찰나 눈에 담았던 누군가를 생각한다. 당신은 분명 죽었는데, 그렇다면 당신의 모습을 하고 날 데리러 온 신일까. 모르는 척 기꺼이 따라가야 할까. 흐르는 시간은 수많은 생각을 이기지 못했고, 아득했던 어둠이 무색하게 아침은 밝았다. 결론은 내리지 못한 채 성당으로 향했다. 확인이라도 해야 했다. 누가 누구의 길을 따라야 할지 결정하려면.

 

 

 

“아니, 이 이른 시간에 웬일이야? 출장 갔었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신부님, 잘 지내셨습니까. 오랜만에 뵙네요.”

 

“나야 뭐 똑같지. 들어와서 아침이라도 먹고 가, 아직 식사 전이니까.”

 

“감사헌디 마음만 받을게요. 요새 바뻐갖고, 다음에 지가 밥 한끼 대접하겄습니다.”

 

 

 

영준은 언제나처럼 사람 좋은 웃음을 보였다. 순간이었다. 철범이 인사를 하고 성당을 나서려던 때,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얼른 식사하세요. 무너져내리는 정신을 가까스로 붙잡고 굳어진 몸을 억지로 돌린다. 눈이 마주친다. 까무룩 기절하기 직전이었다. 해일이 몇 초만 더 늦게 영준을 불렀더라면, 철범이 회사로 향하는 걸음을 조금만 더 재촉했더라면. 이 기적 같은 재회가 성사되지 않았을 것이다. 말 그대로 기적이었다, 황철범에게는.

 

 

 

 

-

 

 

 

 

호텔 바는 나름대로 한적했다. 술이나 한잔하고 담배를 사러 갈 심산이었다. 추천받은 보드카를 주문하고 창가 쪽에 자리를 잡았다. 야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뷰 하며, 딱 봐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잔과 테이블은 제 몸값의 일부겠거니 한다. 무슨 생각이었는지 주량을 한참 넘긴 상태였다. 담배는커녕 제대로 걷지도 못할 정도로 취했다. 이번엔 또 누구 목숨값을 떠넘기시려고. 혼잣말을 하느라 이제야 발견한 건지 맞은 편에 사람 인영 같은 것이 아른거린다. 풀린 눈으로 고개를 들자 서류상으로 닳도록 보던 그 사람이다. 황철범. 러시아 대규모 마약 조직과 거래하는 표면상 무역 회사의 조직원, 행동대장, 뭐 그 비스무리 한 거였나, 체크인은 아마 다음주 일텐데. 해일은 눈을 도르륵 굴렸다.

 

지지리 궁상을 떨고 계시네. 세련된 겉모습과는 다르게 뜻밖의 말투였다. 정확히 무엇 때문에 웃었는지는 모르겠다. 원인이 러시아에서 듣는 전라도 사투리였는지, 당장이라도 모든 것을 토해내며 울어도 용서해줄 것 같았던 눈빛이었는지. 아무래도 좋았다. 누구의 입술이 먼저 맞부딪혀왔는지, 누구의 몸이 먼저 엉겨왔는지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작전의 일부라고 치고, 이 모든 게 작전상이라고 치고, 이 긴 밤 동안 김해일은 사랑도 할 수 있겠다 싶었다.

 

 

 

“나 일을 좀 구할까 하는데.”

 

 

 

함께 몸을 섞은 것이 며칠째였는지는 모르겠다. 태연하게 담배를 피던 해일은 대답 없는 철범을 돌아본다. 너네 회사는, 안될까? 앞서 던진 말을 간 본 걸로 치자면,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미끼를 던진 것이었다. 철범은 흔쾌히 끄덕였다. 사장헌티 말해볼게. 몸인지 마음인지 모를 무언가를 탐하던 와중에도 대충 이 근방 마약꾼들 심부름하던 놈이라는 언질이 꽤 먹혔나 싶었다. 의미 모를 한숨이 담배 연기에 섞여 나왔다. 지금 제 앞에 서 있는 사람은 저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어느샌가 손에 들려있던 담배가 그의 손으로 옮겨지고, 한 모금 빨아들이고는 그대로 두 동강 내버리는 동안에도, 그는 내 이름조차 알지 못할 터였다. 나는 그에게 죽을 때까지 김이한이어야만 했고, 다정한 키스를 하면서도 자신이 잡아먹는 건지 먹히는 건지 모를 황철범은 적어도 이번 생에서는 진실을 알지 못할 것이었다. 만약 다 알고 난 후에는 어떤 표정을 할까. 해일은 처음으로 궁금해졌다.

 

 

3년은 꽤 길었다. 해일이 제법 적성에 맞는 일인듯싶어 다 때려치우고 눌러앉을까도 생각해 볼만 한 시간이었다. 그럼에도 끝은 다가오고 있다. 이토록 무지하면서도 맹목적인 사랑은 처음이었다. 끝없이 밀려오는 다정함에 잠겨버리고 싶다. 마지막까지 정의 내리지 못한 감정에 호소하며 해일은 습관처럼 말했다. 그거 알아? 너 이용당하는 거야, 나한테. 의중을 알 리가 없음에도 그럴 때마다 철범은 사랑한다고 했다. 죽고 싶었다. 그 감당하지 못할 사랑에, 영영 빠져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위치 받으셨죠? 오늘 놓치면 기약 없습니다. 예.”

 

“약속은 지키셔야 합니다. 그리고,”

 

“이번 일 마무리되면 그만두겠습니다.”

 

 

 

그날도 밤이 가장 길었다.

 

 

 

 

-

 

 

 

 

누구세요? 그게 둘 사이에 오간 첫 번째 말이었다.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한참의 정적 끝에 다시 성당으로 들어가려는 해일과 마지막으로 눈이 마주쳤을 때, 철범은 그 이름을 불렀다. 김이한. 수도 없이 상상했던 목소리였다. 가까스로 마음을 추스린 해일은 부러 단호하게 굴었다. 사람 잘못 보셨어요. 그대로 문을 닫고 들어오자마자 무너져내린다. 재회의 순간을 생각할 때마다 떠올리던 그의 표정이 있었다.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이 세상의 죄를 모두 떠안은 사람마냥 군다. 실의에 빠져 원망스러운 얼굴은 그저 꿈일 뿐이었을까, 왜 당신은 나와 똑같은 표정을 하고 있는 걸까. 해일은 한참을 울었다.

 

결국 자정을 넘긴 시각에 철범은 기어코 김해일의 코앞까지 와버렸다. 차마 십자가는 볼 수 없을 것 같았다. 딱 저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그를 다르게 불렀다. 김해일, 몇 번을 되뇌어봐도 들리는 발음은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고작 몇 분 안에 여러 번 부른다고 익숙해질 일은 아니었지만, 계속 중얼거리다보니 거짓말처럼 그 이름의 주인이 한 발짝 앞에 서 있다. 알고 나온 것은 아니었는지 보자마자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구태여 모르는 척을 하려나 싶었다. 절묘히 김해일의 머리 위에 걸린 십자가를 이제야 똑바로 볼 수 있었다.

 

 

 

“나는, 대체 니가 누군질 모르겄다.”

 

“...”

 

“닌 나한테 진심인 적이 있긴 했냐.”

 

“...넌 아직도 깡패야?”

 

 

 

이 모든 상황이 의문스러운 건 황철범이어야 맞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왜, 김해일이 도통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묻고 있는 건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 마치 저질러서는 안될 일을 철범이 저지른 마냥, 이제는 거의 절규에 가까웠다. 끝없이 물었다. 왜 아직, 왜. 그 한 글자에 대답할 힘은 없었다. 다만 그제야 깨달아 버린 것이다. 자신과 함께했던 시간이, 그에게는 속죄해야 마땅할 영겁의 시간이었다는 것을.

 

그는 불편한 진실을 깨닫자마자 등을 돌렸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해일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것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라는 것을 알았으니까. 제 의문에는 해일의 고통이 필히 따른다는 것을 안 이상 철범은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죽었다, 이것이 황철범의 결론이었다.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철범은 사무실을 벗어나지 않았다. 부득이한 경우를 제외하면 하루에 잠자는 시간보다 책상에 앉아 연말 서류 작업을 하는 시간이 더 많을 터였다. 마음 잡고 회사를 재건한 지도 어연 2년째였다. 모두를 용서해야만 할 것 같은 사람이 저에게만 모질게 군다면, 나름대로 속죄의 방법을 찾아야 했다. 언젠가 떳떳한 모습으로 앞에 설 수 있을 때까지. 물론 그럴 생각은 없었다. 그저 마음의 위안이었다. 고집스럽게 혼자 지고 있는 짐을 조금이나마 덜어주기 위한 발악이었다.

 

 

 

 

-

 

 

 

 

생각해보면, 해일은 확신을 주는 법이 없었다. 매번 앵무새마냥 짧은 대답으로 일관할 뿐이었다. 간지러운 사랑을 이야기하는 말의 끝에는 항상 응, 그래, 나도. 예외 없이 이 세 가지 경우의 수 중 하나였다. 누군지 모를 수학자 아무개처럼 논리정연하게 따지는 것도, 그의 이름을 부르는 말마따나 감정이라는 파도에 휩쓸려 호소하는 것도, 굳은 표정으로 드러내는 노기도 모두 무용지물이었다. 원인이 상대의 오기 혹은 실망인지, 알량한 자존심 때문인지도 모를 얼마간의 연락 두절에도 도통 김해일은 사랑을 말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단지 모든 것이 자신의 탓이라는 듯 애처로운 눈을 하고, 황철범이 필히 무너질 수 밖에 없는 세글자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미안해’를 아마 ‘사랑해’의 몫까지 다 해버렸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날은 확실히 이상했다. 마치 사랑한다고 말해버릴 것 같은 얼굴을 했다. 굳이 꼽자면 이상한 일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명령마냥 내려진 휴가도, 그에 맞게 쥐어진 기차표도. 수년간 일하며 처음 있는 일이었다. 사장이 전해주랬다며 말하는 해일이 곧 울기 직전이라, 그냥 모른 척했던 것일 수도 있다. 중에서도 가장 이상한 건 그 말이었다. 넌, 앞으로 뭐 할거야? 철범은 대답하지 않았다. 한 번도 미래를 이야기하는 법이 없던 사람이었다. 하다못해 바로 내일의 일일지라도, 꼭 아침을 보고서야 말했다. 김해일의 밤에는 오롯이 그 당일 뿐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밤이 가장 긴 겨울을 좋아한다고 했다. 별 시덥잖은 이유라며 웃어넘기는 철범이었지만, 어딘가 모르게 마음이 아릿했다. 흔한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우리, 이제 죄짓지 말고 살자.”

 

“...무슨 소리여.”

 

“니가 휴가에서 돌아오면, 그렇게 살자고.”

 

 

 

따져보면 해일은 한 번도 ‘같이’ 그렇게 살자고 한 적은 없었다. 철범은 상상해본 적도 없는 삶이었다. 한낱 깡패한테 참 거창한 목표라 생각할 뿐이었다. 덕분에 철범은 꽤 오랫동안 그 말을 곱씹었다. 죄를 짓고 사는 법은 알아도 그 반대로 사는 법은 몰랐던 사람이 고작 말 한마디에, 말간 눈동자에 져버린다. 이게 당신이 나에게 내린 벌이자 구원이었나보다. 마음이 흐트러질 때마다 그 얼굴을, 표정을, 눈을 생각했다. 지독한 사랑이었다. 그리고 아마 상대도 그랬을 것이었다. 여태껏 사랑한다는 말은 들은 적 없었어도, 그의 모든 것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을 테니까.

 

철범이 떠난 날 밤에 지옥 같은 소식은 들려왔다. 거래 중에 경찰이 들이닥쳤다고, 조직이 무너졌다고, 김이한이 죽었다고. 죗값은 잔인했고, 한참을 방황하다 결국 길을 찾은 원인은 퍽 웃기게도 그의 말이었다. 속는 셈 치고 그렇게 살아보자 싶었다. 이유는 더 묻고 따질 것 없이 간단했다. 사랑하니까.

 

 

해일은 그 길로 한국으로 돌아왔다. 작전상 후퇴가 아니라 말 그대로 도망이었다. 제 모든 것을 밝히고 철범이 돌아서는 꼴을 차마 볼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렇게 되어버리면 더 이상 자신을 사랑하지 않을 게 분명하니까. 이기적인 선택이었다. 죗값이든 구원이든, 화려하게 포장된 단어 이면에는 이기심뿐이 남았다. 모든 것을 속죄하고 싶었다. 이왕이면 황철범의 몫까지도.

 

 

 

 

-

 

 

 

 

얼추 일이 다 마무리되고, 대영이 부탁했던 자료까지 처리하고 나자마자 철범은 내려갈 준비를 했다. 여수는 그에게 일종의 도피처였다. 기약 없는 휴식인 셈이었다. 듣고 보니 해일은 구담구를 도피의 장소로 삼은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더더욱 부담 없이 갈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김해일은 오지 않을 테니까. 성자와 죄인의 미래가 같은 곳에 있을 수는 없는 법이었다. 진심으로 신에게 그를 양보할 결심이 서면 돌아올 작정이었다. 마주 섰을 때 아무런 미련이 남지 않을 때까지 버틸 생각이었다.

 

그로부터 몇 달 뒤, 영준은 환속하겠다는 해일을 구태여 말리지 않았다. 그저 어렴풋이 매일 누군가를 위해 기도하던 모습을 떠올리며 그 ‘누군가’와 관련된 일이겠거니 했다. 그는 대범 무역이 건실한 회사라는 것과, 제 말에 대한 철범의 대답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김해일의 구원자는 더 이상 신이 아니었다. 어쩌면 애초부터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해일이 평생을 마음에 지고 살던 죄를 고백하고 구원받아야 할 곳은 여기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영준은 그를 아무 말 없이 보내주었다. 해일이 미사 때마다 강조했던 용서는 결국 제 자신을 향한 말이었다.

 

해일은 제 발로 돌아갔다. 자신이 도망쳐 온 곳으로부터.

 

 

철범은 생각보다 편안한 삶을 사는 중이었다. 구담구에서는 우선순위에 대범 무역 빼고는 아무것도 없는 수준이었는데, 여수는 아니었다. 느지막이 일어나 점심이나 저녁으로 무얼 먹을까 하는 게 그나마 가장 큰 고민거리였다. 와중에도 틈틈이 김해일 생각은 빼놓지 않았다.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알려고 한 것이 아니라, 그냥 생각을 했다. 그 눈동자나, 입꼬리나, 유난히 찼던 손, 성한데 없는 몸 따위의 것들을. 겨울이면 유독 더 견디기 힘들었다. 추위에 빨개진 볼을 하고, 얼음장 같은 손을 감싸 쥐면 맥없이 웃던 얼굴을 잊기가 참 힘든 계절이었다.

 

아주 긴 밤이 있는 날이었다. 내일이 없을 것처럼 한참을 매달려오고서도 아직 어둠은 사라지지 않았음에 안도하던 날처럼, 한겨울이었다. 그 모습 그대로였다. 순간 철범은 헛것을 보는 것이라 착각했다. 당신은 어디에도 있고 어디에도 없는 사람이니까. 무엇보다 아직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여전히 안고 싶었고, 입을 맞추고 싶었고, 그의 모든 것을 가지고 싶었다. 황철범에게는 이것이 가장 큰 죄악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서로가 서로의 죄를 마주한 순간, 그들은 깨달았다.

 

 

 

 

“..김해일”

 

“사랑해.”

 

“...”

 

“맹세할게.”

 

 

당신이 나의 구원자구나.

 

비로소 그들은 아침을 맞을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아득하고 긴 밤은 남아 있지 않았다. 평생을 도망쳤던 삶의 끝이 당신이라면, 기꺼이. 사랑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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