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동로맨스
왕만두
작년에는 유난히 겨울이 늦었다. 12월이 다 올 때까지도 철범과 해일은 보일러를 켜지 않고 버텼다. 먼저 무너진 쪽은 겨울이면 손발이 차갑게 얼어붙는 해일 쪽이었다. 야, 안되겠다 보일러 켜라! 한밤중에 문을 벌컥 열어젖히며 온 집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소리를 지르며 들어온다. 전기장판 속에 몸을 꽁꽁 파묻고 졸고있던 철범은 비몽사몽한 정신으로 핸드폰을 확인했다. 그 때가 12월 4일이었나 5일이었나 그랬고 시간도 12시 4분이었나 5분이었나 그랬다. 내가 키자고 할 땐 하나도 안 춥다고 안 키더니. 꿍시렁거리자 그 작은 소리를 귀신처럼 듣고서 또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 그땐 진짜 안 추웠고! 너 나가봐 얼어 죽어! 한밤중에 졸리지도 않은지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화장실로 들어간다. 아차거차거 아차거!! 화장실 안에서 물소리와 함께 해일이 호들갑을 떠는 소리가 웅웅 울렸다. 철범은 이불 안으로 머리를 파묻으며 다시 조용히 꿍시렁거렸다. 쫌 기다렸다 씻지 거 성질머리 하고는 증말. 유사에 파묻히듯 잠 속으로 슬슬 끌려 들어가던 찰나에 침대 안으로 뛰어든 해일의 차가운 손발이 철범의 옆구리며 다리 사이를 파고들었다. 아차거! 아차거! 철범은 얼굴에 얼음물이라도 끼얹어진 사람처럼 자리에서 튀어 올랐다. 이씨 이걸 그냥. 성질을 내며 해일의 몸 위로 체중을 실었지만 그래봤자 차가운 손이 목덜미와 가슴팍에서 체온을 훔쳐간다. 차가워? 안 춥게 해줘? 기어이 무릎이 다리 사이를 뭉근하게 짓눌러댄다. 농담일게 뻔 한 말이었지만 괜히 골이 난 철범이 막 씻고 나와 맨질한 목울대를 깨물었다. 침대는 안 춥지 김해일아, 내일 여그서만 누워있어야? 컴컴한 어둠 속에서 이불에 손발이 엉킨 해일이 잘못했다고 낄낄대며 버둥거렸다. 차가운 바깥 공기가 이불 속으로 휭휭 새어 들어온다. 철범은 입맛을 다시며 곱게 몸을 눕혔다. 내일 보일러 씨게 틀어놓고 하자잉. 문장 끝에 붙은 '참아준다'는 뉘앙스에 해일이 코웃음을 쳤다.
그런데 그 다음날에 둘은 결국 보일러 씨게 틀어놓고 밖에서 하지 못했다. 그 밤에 수도가 얼어붙었고 당연히 보일러관도 같이 얼었다. 둘은 이불을 싸매고 보일러가 왜 안 돌아가지 하면서 헛되게 세 시간을 기다리다가, 맨발로 얼음장 같은 바닥을 딛고서 크다란 몸을 잔뜩 움츠리고 베란다로 나갔다. 급수 버튼을 누르라는데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있어야지. 그리고 일단 씻자고 투덜거리며 화장실로 들어간 해일이 소리를 꽥 질렀다. 야 우리 조때따! 후다닥 뛰어간 철범은 수도꼭지를 붙들고 망연자실한 해일의 얼굴을 보고 상황을 파악했다. 수도관이 터졌다. 해일은 방으로 뛰어 들어가더니 핸드폰을 뒤져 관리소장님의 전화번호를 찾아냈다. 소장님 수도가 터졌나봐요 물이 안 나와요! 그러더니 아까보다 한층 더 세상을 잃은 표정을 했다. 아 예……. 철범이 눈썹을 으쓱 들어 올리며 입모양으로 물었다. 뭐래는디? 해일이 전화를 끊고 울먹였다. 어젯밤에 영하 십 오도였대. 이 주변 다 얼어붙어서 기다려야 된대. 언제까정? 빨라도 내일 저녁에나 사람 온대. 철범은 꼭 해탈한 도사님처럼 허허 웃으며 방에서 비닐봉지 하나를 주워왔다. 해일은 실실 웃는 철범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고 서 있었다. 버라이어티하게 구부러진 눈썹이 '뭐하게?' 보다는 '이 새끼가 지금 뭐하는 거지'에 가까운 질문을 대신 전한다. 찜질방 가자야. 오랜만에 때도 밀고. 해일이 투덜거리며 속옷을 챙겼다. 오늘 하자더니 개새끼. 그 말에 철범이 또 킬킬 웃으며 시뻘겋게 달아오른 해일의 귓바퀴를 앙 물었다. 해일은 철범이 가끔 이렇게 사람 속에 불만 지펴놓고 저는 하나도 안 급하다는 듯이 굴 때가 제일 밉다고 했다. 아니나 다를까 매운 돌주먹이 정확히 명치를 노리고 날아왔다. 뒤로 도망가는 게 0.1초만 늦었더라도 둘은 찜질방이 아니라 응급실에 갔을 지도 모른다.
둘은 야무지게 양머리를 말고 따뜻한 찜질방 바닥에 누워서 다짐했다. 다음엔 절대 수도관 동파만은 막아보자고. 그래서 작년의 뼈아픈 교훈을 반면교사 삼아 올해는 무려 11월부터 집 근처 생활용품점을 들러 거하게 쇼핑을 했다. 베란다 창문에 붙일 뽁뽁이와 은박지 덮개, 문풍지 테이프를 잔뜩 사서 하루 종일 집 여기저기를 단단히 싸맸다. 현관문과 베란다에 스펀지 테이프를 붙여 외풍을 막고 창문마다 뽁뽁이를 바르고 보일러 호스며 복도에 있는 계량기에까지 은박지를 칭칭 감았다. 이번에야말로 안 터지겠지. 낡아서 곧 사망할 것 같은 보일러를 시험 삼아 돌려보니 금세 방바닥이 후끈해졌다. 둘은 히히 웃으며 옷을 벗고 덤벼들었다가, 맨몸으로 바닥에 한 바퀴 뒹굴자마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다시 떨어져서 옷을 주워 입었다. 야 좀 기다리자. 기다리는 동안 배가 고파졌고, 냉장고에 붙은 배달음식 책자를 떼서 뭘 시킬지 한참동안 옥신각신 입씨름을 하고 결국 백 번쯤은 시켜먹은 단골 짜장면집에서 짜장면 두개에 탕수육 세트를 시켜먹고 나니 노곤노곤하게 잠이 찾아왔다. 우리 작년 겨울에 가스비 얼마 나왔더라? 그때 폭탄 맞지 않았나? 잉 수도관 녹이고 나서 하루 종일 돌리다가 십 몇 만원 나왔었제. 보일러를 바꿔야 돼. 보일러는 육십만 원 쯤 하던디. 응 안 되겠네. 그래서 그 날도 나란히 서서 따뜻한 물로 씻고 그냥 잠만 잤다.
이 동네에서 겨울은 늘 그랬다. 앞뒤양옆으로 서너블럭은 될 작은 빌라촌은 만듦새도 벽의 두께도 그 집이 그 집이라 더더욱 그랬다. 철범도 해일도 다른 번지 비슷한 골목 사이에서 이사를 두 번 씩 했다. 빌라 벽돌이 검은색이냐 빨간색이냐, 계단이 연한 회색이냐 하얀색이냐 정도의 차이가 있었을 뿐 집은 거의 비슷했다. 좁아터졌는데도 이상하게 휑한 느낌이 나는 방 옆으로 샤워 한 번 할라치면 변기 위에 물이 흥건해지고 몸을 돌리다가 세면대에 엉덩이가 스치는 작은 욕실. 둘이 집을 합치고 나서는 중문 하나 달린 거실과 침실방 하나, 억지로 만들어놓은 부엌과 아주아주 조금 더 넓은 욕실. 철범과 해일의 윗집도 아랫집도 옆집도 옆옆집도 거진 비슷하게 생겼을 것이다. 온도가 한자리로 내려갈라 치면 관리소장님에게 문자가 왔다. 동파주의, 물 틀어놓고 다닐 것. 아무리 물을 틀어놓고 보일러를 돌려도 얇은 시멘트벽과 바람이 숭숭 드나드는 복도 덕분에 수도관은 툭하면 얼고 툭하면 터졌다. 겨울이면 동네 찜질방이 북적북적 했다. 그리고 늘 그 사이에 철범과 해일이 있었다.
첫 만남은 한여름이었다. 술을 아주 오지게 먹고 철범의 빌라 앞에 주저앉아있던 해일을 마감조 아르바이트가 끝나고 집에 돌아오던 철범이 쌀자루 옮기듯 주워다가 무려 제 침대에서 재워주었고, 그 다음 날 아침이 되자 둘이 같은 과라는 걸 알았다 (철범은 자기는 진작 알고 있었다며 겹치는 수업이 몇개인데 너는 주변을 좀 둘러보면서 다녀야 된다고 잔소리를 해댔다). 그리고 계단을 내려가는 해일에게 창문에 서서 손을 흔들어 주다가 서로의 집이 골목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자취하는 애들은 죄 학교 정문 앞으로 몰려있었고 철범과 해일이 사는 곳은 걸어다니기에는 조금 먼 곳이었으니 둘은 반갑다고 손을 마주잡고 흔들어댔었다. 며칠 뒤 해일이 고마웠다며 학교 뒷문 돈까스집에서 밥을 사주다가 동갑이라는 걸 알았다. 그리고 나서 니가 밥을 샀으니 내가 커피를 사겠다는 철범의 말에 순순히 까페에 앉았다가 각자 핸드폰과 지갑에 걸린 야구방망이 키링을 보고 야구팬이라는 것을 알았으며, 철범의 고향이 여수라는 것과 응원하는 야구팀이 기아라는 것도 알았다. 그리고 해일의 어머님이 전라도 분이시며 모 전설적인 야구선수가 신인상을 받았을 때부터 야구장을 출입하신 골수 기아팬이라는 것도 알았다. 그리고 바로 다음 약속이 잡혔다. 그 날 저녁, 잠실야구장. 기아 vs LG. 좌석은 아무데나 남는 블루석으로. 그게 황철범과 김해일의 시작이었다. 술, 밥, 야구. 해일은 뒤늦게 고백했다. 처음 철범이 해일을 주워갔던 그 날도 야구가 져서, 그것도 1:12로 이기고 있던 것을 8회 말에 역전을 당해서 그렇게 술을 퍼먹었었다고. 야구가 뭐라고! 그깟 공놀이! 그렇게 외치며 바르르 떨어봤자 다른 동기들은 과몰입 야덕 취급이나 하는데 옆에서 철범은 저와 똑같이 심란한 표정을 하며 쪼르륵 쏘주나 한 잔 따라주었으니 해일의 마음이 봄날 눈 녹듯이 졸졸 녹아서 구렁이 담넘어가듯 철범에게로 흘러들어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몇 년 전의 그 해에 기아의 가을야구는 진작 물건너갔다. 잔여 경기는 한참 남았는데 이미 등수가 확정난 터라 둘은 까페나 술집이나 아니면 둘 중 하나의 자취방에 퍼질러져 앉아서 질겅질겅 오징어를 씹으며 이 선수는 이렇고 저 선수는 저렇고 하는 쓸데없는 토론이나 했다. 주 2회 철범은 정문 옆의 까페로 해일은 역 근처 사거리에 있는 까페로 아르바이트를 하러 갔다. 어느 날 저녁, 일이 없는 날이었던 해일은 철범이 근무하는 까페로 찾아와 턱을 괴고 남의 팀 가을야구를 보며 끊임없이 철범에게 스코어와 상황을 전달했다. 자기가 조금 더 좋아하는 팀이 이기면 소리 없이 하늘로 주먹을 치켜들었고 무사 만루를 날리면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몸을 웅크렸다. 이래도 흥 저래도 흥 잔잔한 자기와는 너무 다르게 펄펄 끓고 통통 튀는 해일은 보고만 있어도 재미있었다. 철범이 카운터 너머로 고개를 쳐들 때마다 해일은 기다렸다는 듯 꼭 3루 코치라도 되는 것처럼 손짓 발짓으로 헛스윙인지 안타인지 홈런인지 파울인지를 알려주었고, 주황색 형광등이 보드랍게 어룽지는 계란 같은 광대를 보면서 철범은 불현듯 김해일이 귀엽다는 생각을 했다. 콩깍지는 그렇게 순식간에 찾아왔다. 그 날 이후로 자기가 쉬는 날 상대방의 까페에 가서 앉아있는 게 둘 사이의 불문율이 되었다. 그보다 한참 뒤에 요일을 맞추어 스케줄을 잡기 전까지 계속 그랬다. 시험공부도 혼자 하던 것보다는 그나마 더 많이 했다. 수업은 전공 세 개가 전부 겹쳤다. 철범은 해일에게 흔쾌히 녹음본을 공유하겠노라고 선심을 썼고, 둘은 나란히 앉아 이어폰을 한 짝 씩 나눠끼고 교수님의 강의를 재탕하다가 수업시간에 그랬던 것처럼 그대로 곯아떨어져서 새벽 세시 쯤 프린트물에 침범벅을 해놓은 채로 일어났다. 야, 우리 망했다. 잠을 깨겠답시고 흡연구역으로 도망 나온 둘은 강한 조땜을 느끼면서도 킬킬 웃었다. 담배도 안 피면서 저를 따라 나와 주머니 속에 손을 넣고 동동 발을 구르는 철범을 보며 생각했다. 얘랑 함께 있으면 어째 망했는데도 망한 것 같지가 않았다. 그건 콩깍지와는 조금 달랐고, 그래서 해일은 잠깐 눈을 찡그리고 이게 무슨 이상한 느낌인지 고민을 해야 했고, 그 다음에는.
해일은 일생을 직진만 하며 살았다. 길지 않은 인생을 통틀어 아마 가장 많이 외친 말이 있다면 그건 아마 1등은 '엄마 김해인이 나 괴롭혀' 일 것이고 2등은 '야 마시고 죽자'일 것이고 3등은 '못 먹어도 고'일 것이다. 해일은 몰랐다. 그 노빠꾸 정신이 아주아주 오랫동안 해일의 발목을 붙들 것이라는 사실을. 그 다음날부터 해일은 철범을 만날 때마다 똑같은 표정을 지었다. 미간을 살짝 모은 채로 게슴츠레하게 철범을 쳐다보았다. 꼭 얘가 분명히 누굴 닮았는데 그 누구가 누구인지 도저히 생각이 안 난다는 표정 같기도 했고, 내가 일주일 전에 얘한테 빌려줬던 천원을 받았던가 안 받았던가 고민하는 표정 같기도 했다. 그런 표정 앞에서 철범은 속으로만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내가 얘 좋아하는 거 들켰나, 요새 얘가 나 만질 때마다 막 실실 웃는 걸 알아차렸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초코라떼만 벌컥벌컥 들이켜고 있었다. 해일은 눈을 가늘게 뜨고 생각했다. 뭔 저런 얼굴로 초코라떼를 좋아해? 에스프레소 같은 거 마셔야 하는 거 아냐? 철범이형 철범오빠 하면서 따라다니는 애들은 왜 많아? 다른 애들한테도 나한테 하듯이 잘해주나? 아무나 집 앞에서 졸고 있으면 거둬가는 거 아냐? 그러다 보면 왜인지도 모를 화가 솟구쳤다. 에이씨, 하고 울컥 성질을 내며 의자 다리를 걷어차면 철범은 반항도 하지 않고 허둥지둥 책상을 붙잡으며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왜애. 늘어지는 말꼬리가 다정해서 미웠고 왜 또 갑자기 화가 났냐고 물어보는 목소리가 달콤해서 더 미웠다. 그러기를 한 달 쯤, 딱 겨울방학이 시작되던 날 쯤에 해일은 생각했다. 못 먹어도 고. 빠꾸 없어. 그래서 그 날, 둘이 같은 골목의 다른 계단으로 갈라지기 전에, 해일은 가로등에 퍽 소리가 나도록 철범을 갖다 박았다. 왜, 왜. 제가 둘러준 목도리에 조막만한 얼굴을 반쯤 파묻고서 오백원짜리만한 눈을 부리부리하게 뜬 해일이 그날 철범은 참 무서웠다. 멱살을 잡은 해일이 저한테 따져물을 것만 같았다. 너 나 좋아하냐? 그리고 나서 차갑게 손절당할 것 같았다. 불편하니까 이제 아는 척 하지 말아라. 그런 말 대신, 해일은 눈을 질끈 감더니 빛과 같은 속도로 철범을 향해 돌진했다. 저도 모르게 몸을 피한 철범 덕분에 해일은 철범의 입술 대신 전봇대와 거하게 박치기를 했고, 이마를 붙들고 뒤로 주저앉아 고통에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는 해일을 달래느라 철범은 또 한참을 쩔쩔매야 했다. 마, 말로 허자……. 이 와중에도 곱게 바닥에 닿았던 엉덩이를 털어주는 손길에 해일은 아주 성질이 나서 죽을 것 같았다. 야, 내가 너 좋아하는 것 같은데. 이마에 대왕모기에 물린 것 같은 혹을 달고 해일은 그랬다. 확인 한번만 해보면 안 되냐? 철범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리고 해일은 알고 지낸 지 약 4개월 만에 처음으로 풀죽은 표정을 했다. 걸어 다니는 레드불이던 김해일이, 민망해도 화를 내면 화를 냈지 절대 수그러들지 않던 김해일이.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이더니 그런다. 아 알았어. 됐어. 알아들었어. 그리고 몸을 돌려 자기 집으로 쏙 도망가는데, 철범은 해일이 그렇게 달리기가 빠른 줄을 이때껏 모르고 살았다. 중견수 했으면 잘했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우당탕탕 집 앞까지 계단을 구르듯이 달려 올랐다. 간발의 차로 문을 잡아챘다가 손가락이 잘릴 뻔 했다. 발을 밀어 넣고 시뻘게진 눈을 한 해일과 힘겨루기를 잠깐 했다. 여름에 반팔 아래로 보였던 이두박근은 관상용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해일아, 잠깐만 힘 좀 풀어봐야. 애원을 하고 나서야 문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데 센서등이 퍽 꺼졌다가 다시 반짝 불을 밝혔다. 그 짧은 사이에 해일의 얼굴 위로 주황빛이 번들번들했다. 확인 했는데. 했는데 아니면? 무서운 질문이 철범의 뱃속을 할퀴고 지나갔다. 해일에게는 참말로 다행이게도, 철범도 비슷한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다. 못 먹어도 고. 안 해도 후회해도 후회면 하고 후회하자. 그래서 철범은 해일의 차가운 손끝을 붙들고, 아까 해일이 했던 것보다 반의 반쯤은 느린 속도로 고개를 붙였다. 맞닿은 이마에 퉁퉁 부어오른 혹이 느껴져서 웃음이 새는 것도 잠깐이었다. 철범은 해일이 눈꺼풀을 곱게 내리감는 것까지 확인하고 거울처럼 해일을 따라 눈을 감았다. 맞붙은 입술이 순간 차가웠다가 그 다음에는 군불을 때는 것처럼 뜨겁게 달아올랐다. 해일은 철범의 허리 뒤로 손을 두르며 서투르게 입을 벌렸다. 아까 전봇대에 철범을 처박았던 것처럼 이번에는 현관문에 등짝이 부딪혔다. 그리고 나서는 온통 뜨겁고, 뜨겁고, 뜨겁기만 했다. 맞닿은 입술도, 그 안에 들어있는 살덩이도, 꼭 맞물린 몸도, 아까까지 겨울바람에 꽁꽁 얼어있었던 귀 끝도 뜨겁게 달아올랐다. 자꾸 부벼지는 코끝과 볼도 펄펄 끓었다. 그 중에 제일 터질 것처럼 쿵쾅대는 것은 역시 심장이었다. 철범은 자꾸만 미끄러지는 입술을 고쳐 물면서 눈을 질끈 감고, 눈물이 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울고 있는 쪽은 김해일 이었는데도.
센서등이 몇 번을 깜빡였는지 알 수도 없게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해일은 훌쩍 하고 코를 먹으며 몸을 떨어트렸다. 철범은 덜덜 떨리는 이를 악물면서 물었다. 기여 아니여? 해일은 잠깐 옷소매로 온 볼을 문질러 닦더니, 또 벌컥 성질을 냈다. 아 몰라임마! 짜증나죽겠네! 기면 뭐! 어쩔건데! 씩씩대는 몸을 꼭 껴안으면 두꺼운 패딩 덕분에 겨우겨우 등 뒤에서 손이 맞닿았다. 나는 한참 전부터 너 좋아했는디, 기면 좋것다. 품 안에 꼭 갇힌 몸이 또 벌컥 튀어 오르는 게 느껴졌다. 해일아 우리 연애하끄나. 이건 그냥 고도 아니고 쓰리고다. 철범은 꼭 돈다발을 쓸어 모은 사람처럼 가슴이 따땃해졌다. 홍단청단초단에 고도리에 쓰리고에 흔든 판이다. 해일은 씩씩대며 그랬다. 해야지! 어! 해야지! 당연히! 그 말이 너무 우스워서 철범은 킬킬 웃다가 꼭 껴안은 채로 정강이를 얻어맞았다. 보지도 않고 잘도 찬다. 우리 해일이는 타율이 아주 좋아. 그렇게 김해일이가 우리 해일이가 되고 황철범이가 우리 철범이가 된 날도 아마 겨울의 한복판에서 최저기온이 경신되었던 것 같다.
그게 벌써 몇 년 전이더라. 해일은 머리에 까치 열 마리도 살 수 있을 것 같은 까치집을 이고서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수면양말을 주워 신는 철범을 내려다보며 멍하니 생각했다. 그렇게 열심히 월동준비를 했는데, 12월이 거진 다 지나가도록 잘 버틴다 싶더니 이번에는 아슬아슬하던 보일러가 고장이 났다. 둘 다 차가운 공기 때문에 끙끙 앓으며 눈을 떴다. 물은 잘 나온다. 그러면 뭐하나, 바닥이 냉골인데. 위아래로 껴입은 히트텍을 철범은 곧죽어도 내복이 아니라고 우겼지만 입고 서있는 꼴이 영락없는 내복이다. 해일은 이 와중에 설거지를 하겠다고 내복 바지에 후리스 차림으로 고무장갑을 끼는 철범의 뒷모습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잘 빠진 허벅지며 엉덩이며 딱 달라붙은 옷 덕분에 눈앞에 실루엣이 선명한데 이놈의 날씨 때문에 저걸 벗길 수가 없다니. 사실 그렇게 두근두근한 모양새는 아니다. 발에 신은 수면양말은 커플템이긴 한데 살 땐 귀여웠던 호랑이는 철범이 신으면 얼굴이 죄다 늘어나서 좀 불쌍하게 변한다. 어디 지하상가에서 샀던 것 같다. 굳이 이불 하나를 나눠덮어야 한다는 철범의 쇠심줄 고집 때문에, 툭 튀어나온 발을 이불 속으로 구겨넣을 수가 없었다. 야, 이불 하나 더 사. 당장 철범을 때려잡을 것처럼 길바닥에서 성질을 내는 해일을 달랜답시고 철범은 냉큼 옆에 있는 점포에서 수면양말 두 개를 걷어왔다. 호랑이 모양 하나, 여우 모양 하나. 호랑이는 철범이 신었고 여우는 해일이 신었다. 발에는 주황색 수면양말에 하반신은 회색 내복, 상반신은 남색 후리스. 아주 패션 테러리스트가 따로 없다. 그래서 더 벗겨놓고 싶은지도 모른다. 날두형 차라리 벗고 다녀, 하는 팬의 마음 같은 거? 언젠가 해일이 철범 앞에서 그 얘기를 했다가 아주 호되게 대가를 치른 적이 있었다. 이러다 진짜 짜증이 날 것 같아서 해일은 얼른 고개를 절레절레 털고 전기포트에 물을 올렸다. 야, 따뜻한 물로 해. 너 손등 다 벗겨진다. 그럼 철범은 스펀지에 퐁퐁을 짜면서 웃기만 했다. 보일러 고쳐달라고 집주인한테 문자나 넣어봐야. 이건 그짝에서 해줘야 되는것잉게. 해일은 서랍에서 여분의 고무장갑을 꺼내면서 툴툴댔다. 해준대. 일단 사람 부르고 청구하래서 사람 불렀는데 내일이나 올 수 있대. 둘은 나란히 서서 시린 손끝을 뜨거운 물로 헹궈가며 설거지를 했다. 그릇 끝까지 물 담가두라니까? 아니 담궈놨는디 이게 물이 마른 거여. 말이 되냐? 진짜랑게 허 참 억울허다잉. 그리고 나서는 또 비닐봉지에 주섬주섬 속옷이며 칫솔이며를 챙겼다. 야 우리 찜질방 연권 끊어도 되겠다. 일 년에 한 번 가는디 뭔 연권이여. 어떻게 한 번을 그냥 넘어가질 못하지? 툴툴대며 옷을 주워 입는 해일의 손을 꼭 잡으며 철범이 그랬다. 쫌만 기달려봐야, 곧 이사 가자. 새 보일러 새 에어컨 달려있는 신축으로다가. 해일은 코웃음을 쳤다. 신축을 어떻게 가냐, 결혼해서 집 얻는 것도 아닌데. 그러고 혼자 고장 난 로보트처럼 덜컥거린다. 해일은 결혼 얘기만 나오면 꼭 그랬다. 하지만 이게 하기 싫어서 그런 게 아니고 그냥 혼자 앞서나가는 거 같아서 그런 거라는 것을 알 만큼 철범은 해일을 오래 만났고, 그래서 그냥 웃으면서 해일의 손을 자기 패딩 호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졸업하고 취직만 해봐라, 바로 마이너스 통장 뚫어서 역세권 신축으로……. 둘은 비슷한 생각을 하며 신발을 주워 신었다. 그 땐 수도관이 얼어 터지지도 않을 테고 보일러가 고장 나지도 않을 테니 이렇게 손잡고 찜질방으로 피신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그 때는 지금이 조금 그리워질 것 같다는 생각도 꼭 한 마음처럼 같았다. 대신 집이 따뜻해서 날 춥다고 옷을 못 벗는 일은 없을 테니 그건 좋다는 생각도. 해일이 야 가서 미역국 먹자, 하면 철범이 오늘은 팥죽 무야제, 오늘이 22일인디, 했다. 22일인 거랑 팥죽이 무슨 상관이냐고 물으려던 것은 어느 새 소복이 눈이 쌓인 거리에 쑥 들어간다. 겨울이네, 하고 감탄하면 옆에서 그르네, 겨울이네잉, 하고 대꾸한다. 주머니 속에서 두 손이 더 꼭 붙었다. 코끝은 시려도 맞닿은 손바닥 사이는 후끈하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