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눈
오렌지주스
“신부님, 안 가세요? 눈 많이 내리는데.”
“먼저들 가요.”
“오늘도 황 사장 옵니까.”
대영의 말에 해일이 피식 웃고는 얼른 가라며 손짓했다. 근래 눈이 온 것 중에서 가장 펑펑 쏟아지는 날이었다. 해일은 차가워진 손끝을 비비며 근처에 자리 잡은 카페로 들어가 따듯한 커피 두 잔을 시켰다. 황철범은 아메리카노, 나는 카페모카.
-[끝?]
-[응, 조심히 와.]
오늘은 눈이 꽤 많이 내리는 날이라 조금 걱정은 되었다. 구 형사 말대로 서로 이동해서 갈 것을 그랬나. 커피가 식으면 어떡하지? 쓸데없는 생각을 하던 도중 다시 한번 핸드폰이 울렸다.
-[나와.]
벌써 도착한 건가? 눈이 내리는 창 건너편을 바라보니 익숙한 차에 긴 우산을 쓴 철범이 아직 수트를 벗지 않은 채 저를 보며 웃고 있었다.
“일찍 왔네?”
“그리됐네.”
“근처에 있었어?”
제 말에 그저 웃으며 우산 안으로 잡아당겼다. 잠깐이지만 우산 위로 생각보다 많은 눈이 쌓였다. 조수석 문을 열어 저를 태운 철범이 우산을 탈탈 털고는 운전석으로 들어왔다.
“춥지?”
“느가 더 추워 보이는디. 코가 빨개가지고.”
웃으면서 차 안에 온도를 슬쩍 올려주는 모습을 본 해일은 제가 사 온 커피를 꺼내며 얼른 들어가자 재촉했다. 하지만 아니나 다를까.
<폭설로 인한 교통 마비가...>
도로로 들어서자 움직이지 않는 차 때문에 꼬박 같은 자리를 20분이 넘게 기다리고 있었다. 언제까지 있어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 마시던 커피도 내려놓고 라디오를 켰다가, 핸드폰으로 뉴스를 검색했다가 난리였다. 그렇게 몇십 분을 더 대기하다가 철범이 이내 라디오를 확 돌려 채널을 바꿨다.
“무섭게도 내리네.”
“그러게나 말이다.”
잠시 말이 끊기고 눈이 마주쳤다가 웃음이 터졌다. 같이 살면서 이렇게 눈 속에 갇혀보기도 한다. 마음을 비우니 분위기가 한층 더 부드러워졌다. 으르렁대면서 싸울 때가 언제였더라. 그땐 이럴 수 있을 거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었는데. 황철범이 출소를 하고 나서는 다시 저를 찾아왔을 때, 같이 살자고 말한 그 날. 몇 년을 꼬박 면회 간 것이 헛된 노력이 아니었나 보다. 늦은 나이에 시작된 인연이 아주 소중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등 뒤에서 느껴지는 따듯한 온기에 침대 밖을 벗어나기 힘들었고, 퇴근하면 저를 기다리고 있을 존재에 마음이 달아서 발걸음을 재촉하기도 했다.
“왜 그렇게 헐떡대? 뛰어왔어?”
“아니, 너 기다릴까 봐.”
그런 대화를 주고받은 뒤, 항상 저를 데리러 왔다. 오히려 그를 더 기다리게 만드는 것은 아닌가 싶다가도. 따듯하게 웃는 얼굴을 보면 수고스럽게 오지 말라는 말을 건네진 않았다. 그러면 손을 맞잡고, 오늘은 어땠는지 뭘 했는지를 공유하고 짧은 입맞춤을 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와 저를 포근하게 안아주고. 얼굴을 마주하면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도 몰랐다.
“이제 곧 크리스마스다.”
“그러네.”
“그러면 또 새해.”
“아따, 시간 빠르다. 벌써 몇 살이나 처먹은 거여.”
허탈한 말투에 또 웃음이 터졌다. 세월이 흐르기는 한 건지 저만 알 수 있게 얼굴에 표가 났다. 크게 변하지 않은 얼굴이지만 조금 살이 빠져서 주름이 깊어졌다. 더 날이 선 듯한 얼굴에다가 무게감이 생겼다. 같이 산 지도 벌써 1년이 다 되어간다. 처음으로 같이 맞이하는 연말과 연초. 조용하게 흐르는 노래에 섞여 와이퍼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창밖에는 몇몇 사람들이 답답한지 운전석을 뛰쳐 나와 담배를 피우고 있었고, 앞 상황을 보러 차를 두고 걸어 나가기도 했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해일이 궁금한 듯 물었다.
“가지고 싶은 거 있어?”
“이미 가졌는디. 뭘.”
“어후, 그런 말은 도대체 어디서 배우냐?”
소름 돋은 팔을 슥슥 문지르자 약하게 치대온다. 능글맞은 웃음으로 저를 바라보는 눈빛이 퍽 따듯했다. 예전에 느껴보지 못했던 수많은 감정이 들어있는 눈.
“그럼 하고 싶은 건?”
“음, 글쎄.”
“소원 같은 거.”
“...들어주려고?”
“이상한 거 말하면 죽는다.”
보내온 야릇한 시선을 애써 외면하며 선을 그으니 입을 삐죽 내밀고는 손끝으로 핸들을 톡톡 쳐댔다.
“없어?”
벌어질 줄 몰랐던 입이 갈라졌다.
“별거 없는디.”
“뭔데.”
“...그냥 눈 감고 뜰 때 얼굴 봤으면 좋겠고, 같이 걷고, 토닥거려주고, 손잡고 흔들면서 같이 웃고, 같이 울고. 그런 거? 지금처럼.”
“...”
“과거 험한 새끼한테 별거 긴 허네.”
지나치게 평범한 소원이었다. 소중해진 일상. 한 번도 가져본 적 없었고 생각해보지 않은 미래였다. 철범은 물론 해일도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미래. 언제 죽을지 모르는 전쟁터에서. 언제 칼이 찔릴지 모르는 뒷골목에서.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아닌 버티는 것이 되었던 지난날들에 비해, 너무 조용하고 평범한 삶이 찾아왔다.
“그니까 평생 내 옆에 있어 줘.”
차 안에 노랫소리보다 밖에서 눈이 내리는 소리가 더 크게 들리는 날이었다. 언젠가 이 신부님이 거둬주셨던 그 날. 세상에 혼자 남겨졌던 그 눈 내리던 날. 지금은 눈을 같이 맞아줄 단단한 사람이 옆에 앉아있었다. 바라보는 눈이 깊었다. 아마 제 눈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김해일?”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마음 한쪽이 뻐근해졌다. 그 소원을 이뤄줄 수 있다는 확신이 차올랐다. 미래를 꿈꾸지 않은 사람들이 미래를 꿈꾸게 된 어느 눈 내리던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