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상 (理想)
삼
겨울이 싫었다, 어렸을 때 부터 지금까지 늘 저에게 삭막하기만 하던 겨울은 늘 우울하기 짝이 없는 계절이기에, 그림자 속으로 사라져 썩어들어가는 것들을 양분으로 삼아 빛속에 살아가는 것들만 남겨, 그들만이 숨쉴 수 있으며, 오직 그들만이 뿌리를 뻗을 수 있도록 함으로, 숨을 뱉을 때마다 깊숙히 들어오는 공기의 한기만큼이나 역겹기 그지 없는 것 이라, 모두 게워내어 비워버리고 싶은 울렁거림이 이르는 것 이었다 그럴때마다 어릴적 저는 늘 가장 깊은 구석에 처박혀 제 숨을 틀어막으며, 우그러져 속 부터 곪아가던 감정에 관해 이해해보려 애를 썼고, 남은 온기를 잡으려 손을 뻗었다, 그게 부질없는 일인것임을 무시했기에 가능한 일이었으리라, 해일이 바람빠지는 소리를 내며 픽하고 웃어보이다 이내 눈을 굴린다 어릴 적, 저를 지독히도 괴롭히던 그 추위는 잔상 마냥 늘 저를 따라붙어, 제 숨통을 틀어막기는 것 조차 유희로 여기며 고작 개미새끼 한마리 죽이는 것 처럼 망설임이 없다, 그때문에 저가 무엇을 잃었는지 조차 모르면서 말이다 느리게 눈을 깜빡여 본다 창문 새 들어오는 겨울의 햇살은 늘 눈물이 흐를 정도로 찬란하여 눈을 뜰 수 없다 그렇기에 또 다시 그림자 속으로 기어들어가는 꼴이란 정말 토악질 나도록 역겨워서 또다시 스스로의 목을 죄여 숨을 틀어막아본다 이상理想은 저에게 거짓된 행복이 아닌 현실을 건넨다.
***
"예전에, 진짜 어렸을 때 말이야"
겨울이 싫었거든, 그래서 겨울만오면 다른 애들 다 나가서 뛰놀 때마다 나만 남아있었어 해일이 중얼거리듯 내뱉다 이내 입가에 웃음을 머금는다 작게 떨려오는 입꼬리에 철범은 해일을 당장이라도 끌어안고 싶은 충동에 휘쓸려버리기에, 해일의 손을 힘주어 잡아올렸다, 손 끝으로 퍼지는 냉기에 철범이 입꼬리 끝을 굳힌다, 숨을 들일 때마다 들어오는 한기가 소름끼친다
"그냥, 싫었어 겨울도 나가서 노는 애들도 그러면 걔네들이 뭐라 하는 줄 아냐? 해일아, 너는 왜 안 나와, 재밌어 같이 놀자 뭐, 그딴 식으로 얘기하더라?"
씨발, 재미? 해일이 조소를 터트리며 웃어되다 이내 철범의 옆에 기대앉아 턱을 괸다, 억지로 끌어올려진 입꼬리에, 잔뜩 쳐진 눈이 금방이라도 스러질 것 같아, 해일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간다
"재미라는 거야, 본인들도 알면서, 그곳의 겨울이 얼마나 역겨운지, 다른 애들이 현실을 살 때 우리는 늘, 본인 이상理想을 말했어, 뭐 일거다, 그럴꺼다, 다 추측형인, 확실치도 않은 그런 것 들"
근데 씨발, 나는 그것도 못해서, 해일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려오다 멈췄다 그것도 못해서 진짜, 거지같더라,그 부모라는 사람에게 버림 받던 그 순간 부터 계속, 얼마나 엿 같던지, 담담한 듯 내뱉는 음절이 어지럽게 얽혀 이내 부숴진다 부러질 듯 앙상히 뼈만 남은 가지 위 무채색 하늘 속, 쏟아지던 눈을 볼 때면 가끔은 그 부모란 인간이 생각나기도 했다, 일말의 감정 조차 생기지 않는 그 인간의 잔상 뒤, 떠오르는 제 아버지를 만난 날 조차 겨울이다, 정확히는 이영준이라는 사람이 저라는 불행을 만난 것 조차 겨울이라는 것이 맞겠지만, 아, 진짜 짜증나, 해일은 이내 입을 닫아, 탁상에 얼굴을 묻자 철범이 연다
"김해일"
해일아, 철범이 해일을 일으켜 안았다, 굳이 이상理想을 꿈 꿀 필요 없으야, 니가 그럴 필요도 없이 행복하면, 나가 그럴 필요도 없이 행복하게 만들어주면 그런 거 꿈 꿀 필요도 없으, 그러니까 느는 지금만, 너만 생각혀라, 해일이 눈을 굴리다 이내 눈꼬리 끝을 휘어 웃어보인다
"많이 컸다, 황철범 지만 생각하던 새끼가"
그럼 한 번 행복하게 만들어줘 보던가 해일이 웃었다, 겨울에는 그저 시들어가는 것들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피어나는 것들이 생길 거라고, 그게 그림자 속이든 철범이 제 손에 힘을 준다, 손 안, 작은 금속의 감촉에 미소가 새었다, 그림자 속에서 태어났더라도, 가장 깊숙한 곳에 쳐박혀 있더라도 살아남는 것들이 있을 것 이다, 철범은 그저 말없이 해일을 안아든 채 웃어보였다 금방이라도 내뱉고 싶은 말들이 있는, 그저 평범할, 하지만 늘 같을, 그런 겨울의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