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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안개

​독구

어머니를 여의고 혼자가 된 철범. 철범은 안개가 자욱하던 아침, 나무를 하러 산에 올랐다. 다른 때보다 더 춥고 스산한 느낌이 드는 산. 곰곰이 날짜를 헤아려보던 철범은 오늘이 동지라는 걸 떠올렸다. 빨리 나무를 하고 내려오지 않으면 어두워져 내려가기 힘들겠구나. 바람 한 점 안 부는 고요 속에서 철범은 묵묵히 산을 올랐다.

 

가득히 나무를 싣고 내려오던 철범은 어두워지는 주위에 빠르게 발을 놀렸다. 아침부터 자욱했던 안개는 걷힐 생각 없이 그 밤에도 껴있었다.

 

발을 헛디뎌 휘청인 철범이 절벽으로 굴렀다. 등에 지고 있던 나무는 까마득한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 간신히 잡은 돌부리가 조금씩 흔들렸다. 바스락- 바스락- 인기척이 들리자 철범은 소리쳤다. 살려주시오, 살려주시오, 여기 사람이 매달려 있소. 사라진 인기척에 철범은 ‘이대로 죽는구나!’ 하고 눈을 감으려던 순간, 커다란 동물이 다가왔다. 줄무늬와 눈은 호랑이가 분명한데 새하얀 털을 가졌다. 산신인가. 살려주시오, 살려주시오. 동물이 커다란 앞발을 휘둘렀다. 철범은 정신을 잃었다.

 

 

 

절절 끓는 바닥에 등이 뜨거워 철범은 눈을 떴다. 사람 하나 없는 집. 베고 누운 이부자리가 전부 비단으로 되어있었다. 죽어서 이 세계라도 간 건가 싶어 창호지가 발린 문을 열고 마당으로 뛰쳐나왔다. 대궐 같은 대문을 연 철범은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어우러진 산등성이. 어제와 달리 안개가 걷혀 환하게 보이는 절경.

 

자신이 뛰쳐나온 기와집과 펼쳐진 풍경은 어울리지 않았다. 다만 제가 이 산을 타면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이 살지 않는 산에 커다란 집이 있다는 것이 놀라워 한동안 넋을 잃는 듯 철범은 서 있었다.

 

멀리서 갓을 쓰고 비단옷을 입은 남자가 걸어왔다. 이 집의 주인이었다. 철범은 고개를 조아렸다.

 

“긴 밤잠은 잘 주무셨는지요?”

“네.”

“같이 아침밥 한술 뜨시지요.”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아닙니다. 이것도 인연이니 편히 쉬다 가십시오.”

 

집에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 같았는데 방 안에 들어가니 밥상이 준비되어 있었다. 철범은 드시지요, 라는 목소리에 선비님 먼저 드시라고 했다.

 

“선비님이라 하지 마시고 말을 편히 놓으셔도 됩니다.”

“어찌 제가 감히.”

“괜찮대도. 난 김해일이라 하오.”

“난, 난 황철범이라 하오.”

“술 한 잔 받으시오.”

 

철범은 해일이 건네는 술을 들이켜고 들이켰다가 취했다. 달아오른 얼굴을 하고 해일의 얼굴을 멍하니 보던 철범이 입을 뗐다.

 

“당신은 이곳에 살면서 커다란 호랑이 못 보셨습니까? 하얀 털을 가진 이만한 크기에 호랑이였는데. 눈빛이 당신을 닮았소.”

 

해일은 대꾸 없이 술을 들이켜다 눈빛이 저를 닮았다는 얘기에 철범을 마주 봤다.

 

“내가 그 호랑이요.”

“그게 무슨,”

 

하얀 연기와 함께 나타난 커다랗고 하얀 호랑이에 철범은 또다시 기절했다.

 

철범이 다시 눈을 떴을 때 보인 것은 제 옆에 무릎을 꿇고 있는 해일이었다. 철범은 눈을 비비고 일어나 해일에게 당신 정말 산신이냐 물었다. 해일은 굵은 눈물방울 뚝뚝 흘리며 울었다.

 

“나는 사실 사신 중 하나요. 서쪽 하늘을 지키다가 죄를 지어 땅으로 잠시 내려온 거요.”

“진정 사신이란 말이요?”

“그렇소이다. 다시 하늘에 올라가려면 저를 받아들이고 평생을 함께하자 약조하는 이를 제물로 바치라고 했소. 사랑에 빠진다 한들 모두 제물이 되기 전 도망을 가니 결국은 이렇게 지내고 있는 것이요.”

“그럼 나를 재물로 드리려 한 것이요?”

 

해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멈출 줄 모르고 흐르는 눈물은 반짝이는 보석이 되어 바닥에 떨어졌다. 철범은 감히 해일을 불쌍하게 여겼다. 하늘에 두고 온 사람이 많을 터인데, 인간 세상에서 누군가에게 마음을 주고 살았는고. 하늘이 그리워 눈물을 흘리는 커다란 눈은 슬픔을 가득 담고 있었다.

 

“내가 제물이 되어주면 되오?”

“그게 무슨,”

“평생도 약조해주고 내가 당신을 위해 제물이 되겠다는 것이오. 어머니를 여의고 낙 없이 살았소. 귀신이 날 안 잡아가나 하는 생각으로 긴 시간을 보냈소. 이렇게 사느니 당신의 제물이 되겠나이다.”

 

해일은 철범을 바라보았다. 흔들림 없는 눈빛이 진실을 말하고 있었다. 땅으로 내려온 지 5년. 이번 해를 넘기면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향락을 즐기며 하늘 다스리기를 게을리한다는 얘기가 높은 이의 귀에 들어가 쫓겨났다. 1년은 참을 만했는데 2년이 흐르고 3년이 흐르고 세월이 자꾸 흘러서, 이러다 하늘로 돌아가지 못해 다가올 죽음을 생각하니 두려워졌다. 열심히 산다고 노력해도 돌아갈 길은 하나여서 많은 사람을 이곳으로 끌어들였지만 결국은 혼자 남게 되었다.

 

 

 

제단에 철범이 올려졌다. 잘 갈린 칼을 들고 있던 해일은 담담히 눈을 감은 철범을 내려봤다. 칼에 힘이 실리고 철범의 가슴까지 갔던 칼은 챙 그랑- 소리와 함께 땅에 떨어졌다. 철범은 감았던 눈을 떴다.

 

“정말 죽으려 했소?”

“그렇소. 하늘에 돌아가고 싶다 하지 않았소? 칼을 들어 어서 내 목숨을 가져가시오.”

 

해일은 바닥에 널브러진 칼을 줍는 대신 제단에 누워있는 철범을 껴안았다.

 

“그대와 내 마지막을 함께 보낸다면 그걸로 됐소.”

“그게 무슨 소리요?”

“당신 같은 사람을 찾으러 하늘에서 내려온 것일지도 모르오. 당신도 나만큼이나 외롭지 않소?”

“나는 괜찮으니 하늘로 돌아가소서.”

 

사람 한 번 죽인 적이 없는 해일은 손을 발발 떨었다. 아무리 목숨을 내놓고 싶다고 한들 나 하나 살자고 살아가야 할 생명을 죽이는 것이 옳은 일인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눈물을 흘리는 해일의 위로 흰 구름이 생기더니 하얀 구름 계단이 내려왔다. 철범은 놀랬으나 그것도 잠시, 해일의 손을 이끌어 계단 위로 걸어가게 만들었다.

 

“자네도 함께 가시오.”

“당신의 마음이 하늘을 감동하게 해 열린 것인데 제가 감히 어찌 따라갈 수 있겠소. 하늘에서 난 자는 하늘로 가고, 땅에서 난 자는 땅에서 사는 것이오. 구름 걷히기 전에 어서 올라가소서.”

 

해일은 철범의 손을 끌었으나 철범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서서히 구름이 걷히니 구름 계단이 구름 속으로 사라지더라. 흔적 없이 사라진 해일을 생각하며 철범은 하늘에 기도드렸다.

 

철범은 다시 해일이 있던 집으로 돌아가니 모든 것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자신의 짐만 남아있었다. 철범은 잠시 꿈을 꿨다, 여기며 산에서 내려갔다.

 

 

 

세월이 흘렀지만 철범은 그날도 어김없이 산에 나무를 하러 올라갔다. 해일을 만났던 날과 같이 자욱한 안개가 껴있었고 춥고 스산했다. 날짜를 헤아려보니 동지더라. 철범은 묵묵히 산에 올라갔다. 다른 날보다 묵직한 지게를 짊어지고 돌아가던 길에 무언가에 걸려 넘어져 절벽으로 굴러갔다. 우수수 떨어지는 나무들, 간신히 붙잡은 돌부리. 이제 해일도 없고 아무도 없으니 죽겠구나.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설마 하는 마음으로 소리 나는 곳으로 고개를 돌린 철범은 하얀 호랑이를 봤다. 제 뒷덜미를 잡고 끌어올려 준 호랑이를 철범은 껴안았다.

 

꿈이라 생각하며 지내려 했지만 홀로 남겨진 외로운 이곳에서 해일이 자주 떠올랐다. 잘 도착했는지 잘 지내고 있는지.

 

품에 가만히 안겨있던 호랑이가 하얀 연기와 함께 사람이 되어 철범을 두 팔로 품었다.

 

“또 죄를 지어 내려온 것이요?”

“그대를 데리러 왔어. 평생 함께하겠다 약조했잖아.”

“그 약조를 한 지가 언제인데 인제야 온 것이요.”

“땅의 사람을 하늘에 데려오기 위한 절차가 복잡해서 그런 것이요. 나와 함께 하늘로 가겠소?”

 

안개가 걷히고 새하얀 구름이 해일을 감쌌다. 철범은 그 손을 기꺼이 잡았다. 두 사람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하늘에서 눈이 내렸다. 몹시 추운 겨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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